홈페이지 自由揭示板 中에서

울산 서생포 왜성을 아시나요?

오랜만에 울산(蔚山)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삼성그룹에서의 32년 중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회사-삼성석유화학(SPC)에서 회사창립 30주년 기념행사로 퇴임 임원들을 울산 사업장으로 초대했기 때문입니다.차제에 잠시 제 행적을 말씀 드리자면 저는 63년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ROTC 1기로 군 입대, 2년 복무하고 나와 처음 취직한 곳이 제일모직 이었습니다.
그 때는 삼성그룹이란 말도 없었고 집이 있는 대구에서 근무하려고 선택한 직장이었죠.그러던 것이 어떻게 30년이 넘도록 그룹내 7개 회사를 돌아가며 봉직하게 된 것입니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간 울산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도로는 넓어지고 도시환경도 깨끗하여 발전상이 뚜렷하였고, 특히 제가 한 때 재직했던 삼성석유화학의 사업장도 사무실이나 공장의 모습이 몰라볼 만큼 달라져 있었습니다.
방문 첫날(9월 16일) 사장을 비롯한 현역 임원들의 정성어린 환대와 성대한 만찬에 이어 다음 날(17일) 골프 모임이 예정돼 있었으나 일행중 저와 또 한 분은 골프를 하는 대신 울산 주변의 역사유적을 탐방하기로 하고 회사의 지원을 받아 '역사탐방'에 나섰습니다.

저는 울산 지역에서 3곳을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첫번째는 울산성(서생리 왜성)탐방과 두번째는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 그리고 마지막 코스를 통도사 방문으로 정했는데, 안내를 담당해준 이장근 팀장과 기사의 협조로 예정한 바를 100%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찾은 곳이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서생 마을' 뒷산에 있는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일명 울산성(蔚山城)입니다. 아시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울산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지휘하여 축조한 성입니다. 출정 당시 나이가 불과 30세였던 가토는 조선에 상륙한 후 곧(1592년 7월) 이곳에 돌로 일본식 성 축조를 지휘하여 약 1년에 걸쳐 공사를 강행하여 이듬 해 1593년에 완공합니다.이 성은 16세기 전형적인 일본식 성으로 해발 200미터인 산 꼭대기에 본성(本丸)을 두고 아래에 제2성, 가장 아래에 제3성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져 성벽과 건물의 흔적만 남기고 있습니다. 산 꼭대기 부분까지 올라갔더니 안내판이 설치돼 있더군요.

곧 현장 관리인이 나타나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안내를 해주면서 일본사람들이 몇해 전에 와서 건네주었다는 왜성의 상상도(等角投象圖)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투상도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면서 5년 전 큐슈(九洲)여행 때 본 구마모토성(熊本城)이 떠올랐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마모토성은 가토가 정유재란 후(1598년) 퇴각하여 본국에 돌아가자 자기의 영지인 구마모토에 축조한 성입니다. 후퇴하면서 그는 울산에서 데려간 수많은 조선인 토목기술자들의 도움으로 1607년, 7년만에 성을 축조, 완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부기(附記)]일본 구마모토(熊本)에는 임진왜란후에 울산에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곳의 지명은 울산(蔚山)이라 불렸고 몇해 전까지만 해도 울산역(蔚山驛)이라고하는 전철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씨는 대부분 西生이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 대부분은 왜 자신의 성이 西生인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나다가 몇 해 전 뿌리찾기에 나선 그들 후손중 일부가 울산에 와서 서생마을과 왜성을 보고 조상의 고향을 알았고 자신의 뿌리를 알고나서는 매년 이 곳을 찾아온다고 관리인이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36살의 나이로 일본에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과 반목하여양자간에는 싸움이 일어났고 결과는 가토가 승리하여 자신이 세운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에서 고니시의 성인 우토성(宇土城)을 내려다보며 '자네는 역시 나보다 한 수 아래야.!'했다고 합니다. 고니시는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반대하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하지만, 가토는 이에야스편에 가담하여 그대로 지위를 유지하여 2대 44년에 걸쳐 구마모토의 영주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가토는 50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죽고 아들 대에 이르러 결국 호소가와(細川)에게 영주자리도 넘겨주고 맙니다.
세상에 영원한 권력과 영화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인 듯 합니다. 여기서 그칠까 합니다.

<제공 이 연(17기)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