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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닥터홀의 조선회상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4년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0년 전인 1894년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두 전쟁 모두 평양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반도를 서로 먹기 위해 열강이 각축을 벌일 때 조선의 조정에서는 미국이 중재를 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1905년 미.일은 비밀조약을 맺었다. 필리핀은 미국 땅, 조선은 일본 땅이라고. 100년이 지난 지금 역전의 4나라가 다시 모여 한반도를 놓고 서로 주판알을 굴리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말한다. 지금은 국제법(International Law)은 없고 다만 제국법(Empire Law)만 있다고. 지금 제국은 어디인가? 이럴 때 힘없는 나라는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하는가?

오늘은 구한말이 배경이 된 셔우드 홀이 지은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란 책을 소개한다.
이 책은 닥터 홀과 그 아들이자 지은이인 셔우드 홀의 2代에 걸친 조선의료 선교사역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구한말인 1890년부터 지은이가 일제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1940년까지 장장 50년간의 홀氏 가족의 조선사랑을 그린 대하 감동드라마다. 닥터 홀은 지은이의 아버지를 말하지만 어머니도 의사이고 저자 및 저자의 아내도 의사이므로 이 책에는 4명의 닥터 홀이 등장한다. 홀氏 집안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그들의 조선사랑을 알아본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윌리엄 제임스 홀氏로 캐나다 사람이다. 목수 일을 하던 제임스는 19살에 죽을 병에 걸렸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가장 괴로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남은 생애를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한 그는 돈을 모아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자격증을 취득한다. 닥터 홀이 된 것이다. 닥터 홀은 미국 빈민가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하다가 미국사람 닥터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약혼을 하게 된다.

먼저 닥터 셔우드가 미국 감리교단 파송 선교사로 제물포를 통하여 조선 땅을 밟게 된다. 이 때가 1890년 11월이다. 참고로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온 것이 1885년이다. 닥터 셔우드는 첫 기항지인 부산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조선 해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갈수록 당분간 내가 살 이 나라를 비상한 관심으로 바라봤다. 최선을 다해 일하려고 오는 나를 이 나라의 산야는 별로 환영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언덕과 산들은 외양이 불규칙하고 매우 가파르며 암석이 많고 거의 나무가 없어 삭막해 보였다."
이 글에서 보듯이 로제타 셔우드는 비상한 관찰력을 가졌다. 또 그녀는 보고 느낀 것을 자세하게 편지나 일기에 기록하는 버릇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면 구한말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이나 의식구조를 알 수 있고 청일, 러일 전쟁, 순종황제 장례식 등 진귀한 내용도 수록되어있다.
닥터 홀은 1년 후인 1891년 12월 부산을 통하여 조선에 오게된다. 이 둘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을 한다. 조선에서 최초로 거행되는 서양인의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신부가 흰옷을 입고 나오자 구경꾼들이 대경실색을 하였단다. 신부가 喪中에나 입는 흰옷을 입고 결혼을 한 것이다.
신혼부부는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난 아펜젤러씨의 빈집에다 신혼살림을 꾸몄다. 그러나 신랑 닥터 홀은 평양에다 선교지를 개척하라는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가고 신부 셔우드 홀만 서울에 남아 의료사역을 한다. 결혼 이듬해인 1893년 11월에 이 책의 저자인 셔우드 홀이 서울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성(姓)을 이름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난 지 1년만에 아버지 닥터 홀이 죽고 만다. 청일 전쟁 후 전염병이 번져 영국 영사관에서 선교사들에게 철수를 권고했으나 의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계속 일하다가 닥터 홀은 결국 그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닥터 홀이 얼마나 무던하고 선교 사명이 투철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한번은 평양에서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가진 어느 관리의 영향으로 군중들이 들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인의 적개심이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닥터 홀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닥터 홀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많은 어린이들이 따라다녔다. 아이들은 그의 수염을 자주 잡아당기곤 하였으나 그는 웃으며 다독거려 줄뿐이었다.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불행한 여인 셔우드 홀을 불러들인다.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 닥터 홀이 죽은지 2달만에 딸 마거리트가 태어난다. 홀 여사는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3년만에 다시 조선에 돌아온다. 미국에 있으면서 홀 여사는 조선에 맹인이 많은 것을 보고 조선어에 적합한 점자 공부를 한다. 제물포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한 달간 아이들이 심한 병을 앓는다. 결국 조선에 돌아온 다음해 딸 마거리트가 죽고 만다. 참 기구한 여사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홀 여사는 1933년 68세로 은퇴할 때까지 조선에 남아 의료선교사역에 헌신을 하였다. 자신의 피부를 떼어 화상을 입은 조선여자에게 이식을 할 정도로 조선을 사랑한 로제타 홀 여사. 여사가 세운 '동대문 부인 병원'이 지금의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이고 그때 뿌린 씨앗들이 우석대(지금은 고대 의과대학), 인천 기독병원, 인천간호보건전문대학이 되었단다.

아들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이름과 조선말을 쓰면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학도의 길을 걷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다시 조선에 온다. 이번에는 의사인 아내 메리안과 함께 온다. 메리안은 초등학교 선생시절 청년 셔우드를 만나 셔우드와 뜻을 같이하기 위하여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 외과의사가 된 여인이다.
메리안은 훌륭한 미모와 재치 그리고 당찬 모습을 갖춘 보석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위급한 환자를 찾아 밤낮없이 수 십리 산골을 걷고, 초가집에서 손전등과 촛불에 의지해 수술을 하는 메리안을 보고 문창모 박사는 "아! 정말 훌륭한 분이야. 환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밤낮없이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단다.
셔우드 홀 부부는 주로 해주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하였다. 당시 만연한 결핵 환자를 위하여 최초로 결핵 요양소를 지은 것도 셔우드 홀이고 요양소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 크리스마스실이란다. 셔우드 홀 부부는 1925년 조선에 도착하여 194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방될 때까지 16년간 조선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한다.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이지만 닥터 홀은 우리가 잘 모르는 분이다. 아마 선교사역지가 평양. 해주라서 그런가 보다. 우리 정부도 홀氏 가족의 헌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단다. 그러다가 1984년에 대한결핵협회에서 지금은 은퇴하여 캐나다에 살고 있던 91세의 셔우드 홀과 88세의 메리안 홀을 초청하였단다. 자신이 태어나고 그토록 헌신하였던 나라에서 44년만에 부른 것이다. 자신을 잊지 않고 불러 준데 감사하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이 노부부에게는 막상 한국에 입고 갈 옷 한 벌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이들에게 모란장을 수여하고 감사의 정을 표했다고 한다.
지금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닥터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 메리안 홀 그리고 지은이의 여동생 마거리트와 아들 프랭크가 잠들고 있다 한다.

<글 장상용(30기)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