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7월24일 [權泰鳴칼럼] 『日本의 武士는 政治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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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24 14:34 조회35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24일[權泰鳴칼럼]『日本의武士는政治人이었다』
(白河天皇)
日本의72代시라가와(白河)天皇(在任1072-1086)은 희대의好色漢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宮中女人들은 말할 것도 없고,심지어 손부(孫婦)까지 범 했으며男色을 즐기기도 했다.게다가 관계를 가진女人들을臣下들에게 선물을 주듯 나누어 주기도 했다.宮中의 수많은女子도 모자라 그는遊女(妓生)까지 불러들였다.그러다 한遊女가 아이를 낳게 되자 더러운 피가 섞였다며母子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이 사실을 알게 된遊女가,아이와 함께 피신했으나 결국 잡혀遊女는 처형되고 아이는養子로 입적시키겠다며 허락해 달라는皇室警備武士‘다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의 간청을 받아드려 살려주었다.이 아이가 바로日本武士政治의 기반을 확립한‘다이라노 다까모리’(平淸盛)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듬해인1160년淸盛(淸盛)는 정3위인 참의(參議)자리에 올랐다.상급귀족들에게만 붙여지는 구게(公卿)집단에 들어가는 이 직위가武士에게 부여된 건日本歷史上처음이다.이로써淸盛은天皇이 주재하는御前會議에 참석하게 됐다.淸盛은 그 후 승진을 거듭해7년 뒤인1167년엔 드디어朝廷의 최고위직인太政大臣職을 거머쥐었다.淸盛은 헤이시(平氏)에 입적된 후20대 때는 당시 횡행하던 해적소탕에 나섰다가 도리어 해적과 한패가 됐으며 약탈한 식량과 물자를 생활이 어려운 농어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당시는 아사자가 많을 때였다.그는日本으로 들어오는 송(宋)나라商人들과 알게 돼 본격적인對宋貿易에 힘을 기우려 막대한 부를 쌓아 가세를 크게 불렸다.淸盛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거칠었으나 의협심이 강하고 두목 자질이 확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平淸盛)
太政大臣에 오른4년 뒤淸盛은 딸을天皇妃로 들여보내고 이어 출생한外孫子를天皇자리에 앉히는 등 그야말로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다.그는宋나라와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日本쪽 무역기지를九州의博多로부터,도읍인京都가까운 곳에 새 항구도시를 건설했다.후쿠하라(福原)라는 이름을 붙인 이곳이 현재日本3大국제무역항의 하나인 고베(神戶)항이다.항구가 완성되자淸盛는 아예 도읍을 헤이안교(平安京,現 京都)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淸盛 家門안에서도 반대가 많아遷都5개월 만에 다시平安京으로還都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東大寺)

權力의頂上에 선淸盛의 독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그에게 비판적인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했다.특히 반대세력의 본거지였던奈良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등 사찰을 파괴하고 고시라가와(後白河)天皇을 유폐시키며 후지와라(藤原)家출신을 비롯한39명의 고위공직자를 해직시켰다.뿐만아니라自己家門을 위한大形神社를 건립하고 항만공사를 위해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폭력적인 조치가 거침없이 이어졌다.그의 이 같은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세력의 반발 징조가 안팎에서 점차 구체화 되어갔다.

때마침 심한 기근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진 데다 내대신(內大臣)인 그의長男이 병사하고 얼마안가 그 자신마저 권력의 정상에 오른지14년 만에原因모를 병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그리고4년뒤인1185년‘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義朝)가 이끈連合軍과의 싸움에서 완패당한淸盛家는政治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平淸盛의 권력이25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日本武士政治의礎石을 깔아놓고 떠났다.淸盛측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겐지(源氏)軍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자大將인源義朝는武士政治의 확립은平淸盛때문에 가능했다며 공을淸盛에게 돌렸다.
이時期우리나라도武士政治시대를 맞았다.高麗明宗원년인1170년鄭仲夫와李義方등이 일으킨武臣政變으로 본격적인武人政治시대가 시작됐다.武士政治는1270년까지 집권자를11명이나 바꿔가며100년 동안 이어졌으나文臣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政變을 일으킨 다소 우발적인 데다 국가경영의靑寫眞이 없었고武士상호간의 심한 갈등으로 싸움만 일삼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반면日本武士들은領主와百姓이 공동운명체를 이루었던戰國時代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조정을 받들고 백성들과同苦同樂하며爲民정책을 꾸준하게 실행했기 때문에700여년 동안 이어졌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日本의 국가조직 및政治기반과 국민의식의 틀이 오랜 기간 이어진武士時代를 통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日本도平淸盛의 등장 직전까지武士는貴族들로 부터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당시貴族들은皇室경비가 주임무였던武士를‘皇家의 개’라고 까지 무시했다.흔히日本의 문화를‘검의 문화’라고 한다.日本人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충성,절제,정확,질서,인내,순종 등의 문화는 모두700년에 걸친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다져진武士文化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日本의武士는 사회적身分인 동시,武藝라는 예능을 가업으로 삼은 직업적身分이다.아무리武藝가 뛰어나고身分이 높아도武士출신이 아닐 경우武士로 인정되지 않았다.武士는武官이나武人과 구별된다.武人과武官도 무장을 하지만 관리의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日本에도 중세 들어武人이 정착된 뒤까지 조정에武官직종이 있었으나武家출신이 아닌 경우武人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겐지(源氏),헤이시(平氏),후지와라(藤原)등이日本의 대표적인武家인 동시貴族이며 많은日本의 유력한武家는 대부분 이들 세家系에 기원을 두고 있다.
17세기江戶幕府가 들어서면서武士신분은 사무라이(侍)와 카치(徒)로 나뉘어졌다.사무라이는主君을 받드는 무예자로서 전쟁 때는 지휘관 신분으로 말을 탔다.일정 규모의 토지를 소유했던 사무라이 중 일부는 영지(領地)규모가1000섬을 넘는 경우도 있었으며幕府의 정무직인 가로(家老)등 상위직을 맡았다.한편 카치는 일정량의 쌀을 급여로 받았으며 전쟁 때는 도보로 참전한 하급武士다.武士는江戶時代의 신분계층인 사농공상(士農工商)중에서最上位의 신분이었다. 2026-05-24權泰鳴 作成, 2026-07-24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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