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7월15일 [解說] 1935年 發表 『목포의 눈물』을 再照明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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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15 15:38 조회68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15일 [解說] 1935年 發表 『목포의 눈물』을 再照明한다
◆1935년 1월28일자 朝鮮日報에 특이한 광고가 실렸다. ‘오케-레코드’가 낸 ‘第1回 鄕土노래 현상모집’이었다. 1932년 公州태생 李哲(1903~1944)이 설립한 오케레코드는 高福壽(1911~1972), 李蘭影(1916~1965), 南仁樹(1918~1962) 등 인기가수들을 거느린 음반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음반기획사였다. 광고는 京城(=서울),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 등 10개 도시를 소재로 한 노랫말(=歌詞)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朝鮮10대 都市讚歌募集’이란 제목을 크게 달았다. 2월15일자 신문에도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응모 마감은 2월말이었다. 이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日帝時代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불리는 노래가 탄생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하는 ‘목포의 눈물’이다. 노랫말을 쓴 文一石은 日本早稻田(Waseda)大學을 卒業한 木浦出身 詩人이라는 사실만 전할 뿐, 구체적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孫牧人은 1992년 낸 회고록 ‘못다부른 타향살이’에서 ‘木浦에서 樂器店을 경영하던 李蘭影의 오빠 李鳳龍과 동향지기’로 친교가 있었다’고 썼다. 이난영의 오빠와 손목인이 同鄕知己였기 때문에 李蘭影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①[KBS무대] 현역가왕 _김산하 _목포의 눈물 _KBS 230818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i8daf522g1U&list=RDi8daf522g1U&start_radio=1
②목포의 눈물 – 이미자(1974)
https://www.youtube.com/watch?v=VLQC8vWb8sg
③‘목포의 눈물’♪ TV CHOSUN 260326 방송 | [미스트롯4 이소나]
https://www.youtube.com/watch?v=hV1pZPCErP8
◆〈목포의 눈물〉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李蘭影(1916~1965)이 처음 부른 뒤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는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作詞者는 文一石, 作曲者는 孫牧人(1913~1999)이다. 와세다 (早稻田)大學출신의 20대 無名詩人이었던 文一石은 1935년 朝鮮日報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李哲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었다. 당선작의 가사에 작곡가 孫牧人의 곡을 입혀 취입을 해서 大히트를 기록했다.
◆歌手는 木浦출신의 新人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李蘭影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南道 판소리 가락과 같은 恨이 스며 있다는 評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湖南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木浦港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韓國歌謠史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부산 해운대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부산항에 노래비가 있고, 목포 유달산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木浦와 湖南을 넘어 ‘국민애창곡’이 된 ‘목포의 눈물’을 晉州출신 作曲家, 孫牧人이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東京高等音樂學校에 다니던 孫牧人(1913~1999)은 원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정통 클래식 전공자였다. 孫牧人은 1934년 친척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서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高福壽(1911~1972)의 ‘타향살이’를 썼다. 울산의 국수집 아들인 고복수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李哲 오케레코드社長은 1935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한 孫牧人에게 ‘목포의 눈물’가사를 내보이며 작곡을 의뢰했다.
◆歌詞를 받아든 孫牧人은 ‘구슬픈 멜로디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별과 한(恨)을 품은 노랫말 때문이었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로 시작하는 2절은 원래 壬辰倭亂부터 强制倂合까지 亡國의 恨을 노래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 노래가 인기를 끌자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李哲사장과 직원들을 소환, 조사했다. 2절의 첫대목 가사를 문제삼았다. 음반사측은 ‘원한 품은’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텨서 문제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李蘭影과 관련하여 <Kim Sisters>를 빼놓을 수 없다. 『Kim Sisters』는 李蘭影의 두딸과 오빠인 李鳳龍선생의 딸→세딸(숙자, 애자, 민자)로 구성한 韓國最初의 Girl Group를 만든 것이다. 李鳳龍 선생은, 조카 및 딸 (Kim Sisters)을 동생 이난영과 함께 조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아시아 최초로 美國 Las Vegas에 진출한 Girl Group 『'Kim Sisters』*를 탄생시켰다. Kim Sisters의 멤버(숙자, 애자, 민자) 중 막내인 이민자는 바로 이봉룡 선생의 친딸로, 고모인 이난영의 수양딸로 들어가 함께 활동했다.
◆孫牧人은 오케레코드 지원으로 일본 高等音樂學校로 진학, 작곡과 편곡, 관현악 등 클래식 음악을 계속 공부했다. 1936년 졸업후 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돌아왔다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 ‘아빠의 청춘’ ‘바다의 교향시’ ‘슈샤인 보이’ 등 2000曲 가량을 작곡했다. 光復後 孫牧人의 삶도 곡절이 많았다. 1952년 日本에 밀항해 戰後日本의 히트곡 『카스바의 여인』을 작곡해 인기를 누리다 불법입국자로 몰려 1957년 歸國했다. 越南戰에 위문공연을 다녔고, 美國에 오래 머물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 사이 ‘목포의 눈물’은 호남 연고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응원가로 쓰일 만큼 면면하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타향살이’의 作曲家 孫牧人이 숨을 거둔 건 일본 여행길이었다. 1999년1월9일 東京에서 숨진 그의 訃告記事 제목은 ‘타향서 떠난 타향살이’였다. <終> 2026-07-15, jgchoi 再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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