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7월19일 [權泰鳴칼럼] 明治維新의 産室 하기(萩) 마을 訪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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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19 18:24 조회30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19일[權泰鳴칼럼]明治維新의産室하기(萩)마을 訪問記
日本本土의 맨南端県인‘야마구찌’(山口)県의‘하기’(萩)는 한中小港口都市다.우리나라東海쪽에 위치한‘하기’(萩)앞바다는 남쪽의‘나가가도’(長門)와 북쪽의‘다마가와’(田万川)의 작은半島인‘다카야마미사키’(高山岬)까지60여km가‘기따나가도’(北長門)海上國立公園으로 지정되어 있다.외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알려진觀光地도,자연경관이 빼어난 곳도 아닌‘萩’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이곳이明治維新을 성공시킨日本現代化운동의産室이었기 때문이다. ‘사츠마’(薩摩)藩과 더불어明治維新의 주축의 하나였던‘조슈’(長州)藩의 중심이 바로現‘야마구치’(山口)県의‘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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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田松陰)
교통도 불편하고奧地인 이漁村이明治維新의發源地가 된 것은未來를 내다본弱冠의先覺者‘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 개혁을 주창하면서 젊은 청소년들을 모아 앞서가는西洋學文을 가르친 데서 비롯된다.幕府打倒운동을 주도하던 그는30세에幕府에 의해死刑당했지만 그에게 배운 젊은後進들이 뒷날明治維新의主動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世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日本의 장래를 걱정했던‘요시다’는留學을 위해美國으로 가려고Perry의黑船에 잠입했으나 실패하자 그의 숙부가 운영하던 고향인‘하기’(萩)마을의 열 평 남짓한‘쇼카손쥬꾸’(松下村塾)學堂을 인계받아 당시武士나平民출신을 가리지 않고 젊은이들을 모아西洋學文을 가르쳤다.훗날明治維新운동을 주도한‘다카스키신사쿠’(高衫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등이 모두 그의門下生들이다.그 후‘萩’는總理를4명이나輩出했다.

(松下義塾)

(講義室)
日本이西歐에 창문을 연 것은 멀리1543년‘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時代로 거슬러 올라간다.九州‘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Portugal商人으로 부터銃製作기술을 배웠고,그 뒤로도基督敎를 받아드림으로서 본격적으로 시작된西洋과의 교류를 통해 이들로부터 각종 기술과 의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先進文化를 흡수함으로써 일찌감치先進國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그 후1854년美國의Perry提督과 체결한美日和親條約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英國,네덜란드,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음으로써日本은 공식적으로對外開放政策을 채택하였다.우리는 이 시기가哲宗즉위初期로安東金氏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이르고 나라 밖 사정에는 깜깜한 때였다.明治維新의 중심인물들이 주로‘사쯔마번’(薩摩)藩)과‘조슈번’(長州))出身이지만維新運動의 시대적 필수성과 그 모델이 될西洋思想과 정치제도의 도입에 있어 선도적 역할이‘萩’에서 배양되었기 때문에‘萩’를 유신의 고향이라고 부르는데 대해日本사람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한다.이곳에는維新主役들의生家나,살았던 집,그리고 관련 유적들이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2015년11월3일 아침8시에仁川을 출발한 비행기는50분 만에‘후꾸오까’(福岡)공항에 착륙했다. ‘하카다’(博多)驛으로 가 신칸센(新幹線)으로‘오고오리’(小郡)이란데서 버스를 갈아타고‘萩’로 향했다.오고오리역에서50여km거리인‘萩’까지는 버스로1시간10분이 소요되었다.도중에 마을이 별로 없는 계속되는 산길이었다. ‘萩’는 우리나라 쪽으로 위치한人口4만여명의 작은港口다.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출발하는 산요혼센(山陽本線)이 있지만 완행이라 더디기때문에‘하카다’(博多)驛에서新幹線으로 오고오리까지 가서 거기서 버스를 타는 게 편리하다. ‘萩’는 지금도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日本처럼 철도나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이 잘 발달된 나라에서 지금도 이 정도니明治維新당시인130余年 前에는奧地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택시로10여 곳을 도는데 두어시간 걸렸다.



(伊藤博文 生家)
‘萩’에는‘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옛집과 그의銅像,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生家,그의‘쇼카손쥬쿠’(松下村塾)學堂, ‘기도다카요시’(木戶孝允), ‘가쓰라고고로’(桂小五郞)의生家, ‘다카스기신사쿠’(高杉晋作)_의生家,그리고 이곳의 옛藩主였던 모오리(毛利)家의 허물어진 성터 등 역사적인 유적이 작은 지역 사방에 산재해 있다.伊藤博文이14세에서13년간 살았던 집은29평의 크지않은 한층 짜리木造草家집이다.이집은 현재日本國家史蹟으로 지정되아있다.집마당에는伊藤의全身銅像이 서있다.이집 옆에總理시절東京에서 거주했던 큰 규모의 저택을 옮겨 놓았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1841년9월2일‘조슈번’(長州藩)(지금의山口県) ‘구마게’(熊毛)에서 빈농인‘하야시 주죠’(林十藏)의 아들로 태어났다.집이 워낙 가난하여 아버지가 빚에 시달리다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7세때 외가에 맡겨졌다가9세때‘이또나오우에몬’(伊藤直右衛門)이라는 말단武士의養子로 들어갔다.이것이 훗날伊藤이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木戶孝允)


그는 어릴때 건강은 약했지만 영악스러워 골목대장 노릇을 했으며 또래끼리의 놀이에서도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상대방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해서라도 이기고마는 악착스러운根性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어느 날 전쟁놀이를 하던중 자기편의 정세가 불리해지자伊藤은 상대편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도망갈 길을 막은 뒤 불을 질렀다.전쟁놀이에는 이겼지만 상대방 아이들이 화상을 입어 어머니가 이웃에 사과하러 다녔다고 한다.伊藤은13세때인1854년‘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쇼카손쥬쿠’(松下村塾)에서 처음으로現代學文에 접하게 된다.그리고23세때인1864년‘이노우에가오루’(井上馨)등과 함께英國으로 이른바 적정시찰여행을 떠난다.그 뒤1885년初代內閣總理, 1888년初代樞密院議長, 1892년 제2차總理, 1898년 제3차總理, 1905년乙巳條約체결,初代朝鮮統監,그리고1909년Harbin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義士에게 사살되는 등으로 그의 생애가 이어진다.
산업시설 이라고는 어묵공장 등 몇개 밖에 없어 젊은이들이 자꾸만大都市로 떠나人口가 줄고都市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萩’市는 그래도 조상을 잘 둔 덕분에日本 全國에서年中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그 수입으로 그럭저럭 먹고산다고 한 택시기사가 알려주었다.갔던 날이 월요일 인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골목을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維新의故鄕’이라고 쓰인 마을 입구의 붓글씨 간판이,돌아가는 버스 뒤로 금방 멀어져갔다. <終>
2015년11월,權泰鳴. 2026-07-19,서울商大58會(16回)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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