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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7월23일 [權泰鳴칼럼] 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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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23 13:39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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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723[權泰鳴칼럼]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3/4)

 

集安市 長壽王陵.png

   (長壽王陵)

集安市에서 북쪽으로5km거리에 있는長壽王陵인 장군총은 대표적인高句麗式 積石陵이며413-490년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東方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고분은 길이가5.5m에 이르는 돌을 깐1층 기반 위에 모두1100개의 화강암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7단으로 쌓은 높이12.4m에 각 변 길이가31.6m에 이르는 피라미드모양의 거대한이다.高句麗歷史에 관해中國東北工程문제가 나오면서中國集安시 일대高句麗유적에 대한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으며 특히高句麗歷史에 관해 한국관광객들과의 대화가 엄격하게 통제돼있다고 근처에서 만난 한朝鮮族 老人이 일러주었다.

 

廣開土大王碑2.png


다음 행선지인延吉로 가기 위해 점심시간 전에 서둘러集安을 나와吉林으로 차를 몰았다.부슬비가 내려 그렇잖아도 속도를 내기 힘든 산길이 더욱 어려웠다.吉林엔 이미 어둠이 깔린 초저녁7시 넘어 닿았다.꼬박 이틀간 교통편을 제공해 준 두 사람과 작별하고 밤9시반延吉行야간침대열차에 올랐다.열차침대가 비좁고 밤 내내 주변이 소란스러워 잠을 설치다가 다음 날 새벽5延吉驛에 도착했다.연일 이어진 강행군에 거의 뜬 눈으로 지샌 후에 내리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주변은 아직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깜깜했다. 10월말인데도延吉市의 새벽공기는 완연한 겨울이었다.앞 광장에 있는朝鮮族식당에서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땅하게 잠시 머물 장소도 없어 곧장 택시를 불러圖們으로 향했다.延吉에서圖們까지는 금방이어서 일찍 닿은 데다 자욱하게 깔린 새벽안개 때문에200m도 안될豆滿江바로 건너편의北韓땅이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圖們韓半島最北端 豆滿江바로 건너편中國쪽에 있다. 3m가 넘을 정도로 넓었던 강폭은 토사가 쌓여 지금은 물길이 실개천이나 다름없게 좁아졌다고中國경비병이 일러주었다.延吉에서 동쪽으로50km거리에 있는圖們은 현재14만명의住民가운데朝鮮族이 약60%에 이른다.圖們은 남쪽으로北韓,그리고 북으로는延邊黑龍江省과 접하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으로도 비중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長春,瀋陽,北京,모란강과延邊東北中國일대를 연결하는 철도노선이 모두圖們을 통과하고 있다.


圖們大橋.png

(白頭山定界碑)


圖們이란 표기에 대해韓國中國간에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1712朝鮮나라가國境線표지석으로 세운白頭山定界碑서쪽으로는 압록강,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선으로 한다라고 새겨져 있으나 후일 토문강의 위치를 둘러싸고朝鮮松花江의 지류로,中國豆滿江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재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中國은 토문을土門대신圖們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토문강의 해석에 따라 영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는데韓國側의 주장대로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볼 경우 지금의中國땅인延邊조선족자치주 일대의間島지역42,700제곱km가 한국영토가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강변을 서성거리며 한참 기다렸다가8시에 입장권을 사,걸어서圖們大橋한 가운데에 그어져있는北韓-中國間 境界線까지 갔다.흰 페인트로 그은 줄 위에境界線을 의미하는변계선境界線이란 세 글자가 한글과漢字로 크게 나란히 표기돼 있었다.동행했던 중국경비병이 마침 북한 쪽 강가에 한가롭게 걸어가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순찰중인 북한경비병이라고 했다.마치 아침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한가해 보였다.圖們大橋는 교량상판 측면을 북한쪽은 푸른색으로 그리고 중국쪽은 붉은색으로 칠해 놓았다.강 건너편에 있는 북한 쪽에 공장인듯한 건물의 굴뚝과 주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마을전체를 희뿌옇게 뒤덮었다.


洪範圖.png

 

圖們에는靑山里대첩과 함께 대한독립을 위한 항일전투에서2대 격전지의 하나로 꼽히는 봉오동(鳳梧洞)戰鬪地가 있다.봉오동전투는1920671개 대대병력의日本軍이 봉오동으로 쳐들어갔다가洪範圖장군이 이끈 대한독립부대와3시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패퇴한 전투이다.장비와 병력 면에서 턱없이 열세였던 홍범도장군 휘하의獨立軍에게日本軍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戰死157,重傷200여 명,輕傷100여 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獨立軍의 대승으로 끝난 이 전투에서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4,중상2명에 그쳤으며 홍범도장군 외 이화일,이천오,강상모,강시범,조식권 등 중대장들이 큰 공을 세웠다.봉오동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만주 일원에서 활약한 모든獨立軍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전투가 벌어졌던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의 상촌 계곡에 그날의 승리를 전해주는 아담한 승전비가 찾아간 참배객을 말없이 맞아주었다.누가 언제 갖다 놓았는지 바싹 마른 국화 한 다발이 흙 묻은 상석 위에 쓸쓸히 놓여 있었다.기념비가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표지판 하나 없어 찾아가는 데 대 여섯 번은 물어야 했다.


청산리대첩기념비.jpg

     (靑山里抗日大捷紀念碑)


靑山里전투에서도 공을 세운 홍범도장군의 말년은 불행의 연속이었다.봉오동전투 이듬해인1921300명의 휘하 병력과 함께蘇聯軍예하부대로 들어갔 그는2년 뒤인1923년 반강제적으로 군복을 벗어야 했다.그 후 그의 인생역정은 급전직하의 비운의 길로 들어섰다.沿海州에서 잠시 집단농장에 속했다가Kazakhstan크질 오르다’(Qyzylorda)로 강제이주됐으며 그곳의 한 극장에서 야간수위와 정미공장근로자로 고달픈 생을 이어가다19431027일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히 눈을 감았다.그의 묘는 카자흐스탄의 크질 오르다에 남아있다.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비판적인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의 헌신이 대한독립의 한 주춧돌이 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19431027일자 레닌기치는홍범도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1025일하오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전우들에게 부고함.장례식은19431027일하오4시에 거행함.부고자:크질 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이라는 부고를 실어주었다.


金佐鎭장군.jpg

(金佐鎭 將軍)

大韓獨立運動史에 찬연히 빛나는靑山里대첩유적지는龍井市에서 서남쪽으로30km떨어진和龍市삼도구(三道溝)마을 백운평의25km나 되는 긴 계곡이다.김좌진(金佐鎭, 1889~1930)장군 휘하의 나중소(羅仲昭)와 이범석이 이끄는北路軍政署軍19201021일에서26일까지6일간10차례에 걸쳐 벌어진靑山裏戰鬪에서2,300여명의日本軍,그리고1022洪範圖장군의獨立軍부대와李範錫중대장이 이끄는2,500명의獨立軍은 어랑촌전투에서日本軍1,000여 명 등 모두3,300여명의日本軍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5만의 병력으로2,500명의獨立軍에 대패한日本軍은 이 전투에서3,300여 명의 전사자를 뒤로한 채 패주하고 말았다.靑山裏전투에서 참패한 후日本軍은 그 보복으로 간도일원에서2,600여 명의 무고한朝鮮人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靑山里대첩 현장인和龍市청산촌의 산비탈 중허리에 우뚝 서있는靑山里大捷紀念碑가 그 날의 싸움터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시산혈해를 이루었을 그 날의 격전지도 지금은 농토로 바뀌었고 평화로운 농촌마을이 우거진 숲속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계속> 2015-10-01權泰鳴 作成, 2026-07-23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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