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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때 휘몰아친 광풍 - 조선인 학살의 진상 /권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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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3-08-22 19:29 조회1,1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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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때 휘몰아친 광풍 - 조선인 학살의 진상] 

권태명(경제학과 58학번)

 

6000명의조선인학살. 일본도쿄스미다구요코쓰나마을공원에세워관동대진재조선인희생자추도비새겨진비문의구절이다. 192391오전115944. 규모7.9도의대형지진이일본열도의허리인관동지방주변10()강타했다. 많은사람들이직장이나밖에서활동할시간대여서관동지방전역은삽시간에아수라장으로변했다. 모든신문들이지진발생에따른긴박한상황을담은호외를뿌렸다. 그리고하루가지난93일에는대부분의중앙과지방신문들이확실한출처제시도없이혼란을틈타불온조선인들이우물에독약을뿌리고감옥문을열어죄수들과함께폭동을일으키며약탈과강간을자행하고있다는내용의기사를1머리에올렸다. 심지어나고야의신아이치(新愛知, 中日新聞전신))신문은요코하마(橫浜)에서무장천여명의조선인들이전투에들어가일본보병1개소대를전멸시킨같다고보도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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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추모비


이 같은 신문보도는 얼마 후 단 한 건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유언비어로 판명 됐지만 보도내용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일본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어 조선인을 향한 적개심에 불을 붙였다. 상황의 긴박함을 느낀 내무성이 서둘러 계엄령을 선포하고 우선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 하라는 공문서를 지진 발생지역 경찰서에 발송했다. 그러나 공문서 내용 중에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범죄나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서 관찰하라”는 지시문구가 포함되어 이 예방적 주의사항을 확대 해석한 신문들이 폭동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로 보도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살육 만행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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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자경단

 

이같은 허위 보도에 대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언론보국회 회장을 지낸 보수언론인 겸 평론가인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는 “조선인의 폭동 이라는 유언비어는 지진에 버금가는 대재앙 이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당시 상황을 취재한  한 언론인도 “당시 조선인에 대한 터무니 없는 보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에 빠져있다”고 후회했다. 지진으로 비롯된 혼란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법무성은 “조선인의 불순한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경찰청도 “민중이 조선인을 박해하고 살상한 사실에 대해 일대한사(一大恨事)”라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사후 약방문에 지나지않았다. 


조선인 학살은 민간인 자경단만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혼란을 수습하고 자경단의 만행을 중지시켜야 할 경찰들이 조선인 학살행위에 수수방관 함은 물론 경찰이 학살을 자행한 경우도 적지않았다. 일부 경찰과 군인들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고 다닌다며 허위 정보를 신문에 제공했다는 사실이 뒤에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테러를 일으키며 사회혼란을 부채질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의 진압에 거듭 실패한 일본 경찰과 군이 명예회복을 위해 조선인 진압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허위 정보를 흘렸다는 주장도 나왔다. 자유기고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 는 지진발생 1년이 지난 1924년에 발표된 한 경찰청보고서에도 “조선인 폭동 설은 유언비어이며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학살은 분명한 사실이었다”고 기록돼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조선인학살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지진 3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여파가 일본으로 번질 경우 지진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이나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해 일본 우익들이 악성 유언비어를 퍼트린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치안당국이 초기 단계에서 유언비어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않자 신문들이 유언비어를 일제히 사실처럼 보도했고 이 때가 적기라고 판단한 자경단이 적극적으로 조선인 학살에 나섰다는 추정이다. 일본 치안당국의 이런 소극적인 자세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경단의 조선인학살행위를 방조한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소설가인 요시무라 아끼라(吉村昭)는 그가 쓴 ‘관동대지진’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폭동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닌 특이한 성격을 띠고있다. 사람들은 갑자기 큰 재해가 닥치면 대부분 정신이상을 일으키기쉽다” 고 분석했다. 역사학자 스즈키 준(鈴木 淳)은 ‘관동대진재보고서’에서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저항운동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민족적인 차별 의식을 가졌던 게 틀없다” 며 유언비어 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있다.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행위가 도를 넘어서자 사태의 심각성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일본인 살육과 독약사용 등이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 임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자경단에 대해서는 사법적인 처벌은 물론 도의적인 책임조차 묻지않았다. 이는 경찰의 지시가 책임면탈을 위한 응급조치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경찰당국의 중지지시에도 아랑곳없이 자경단의 조선인 살해는 한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경찰서에 수용돼있거나 경찰차로 호송중인 조선인이 자경단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아쿠다가와 료노스케(芥川龍之介)는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의 살육행위에 관해 1923년 10월호 문예춘추(文藝春秋)에 실은 ‘或自警團員の言葉(어느 자경단원의 말)’에서 “자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고있다. 인간이라면  서로가 연민의 정을 가져야 하거늘 도리어 살육을 그렇게 쉽게 여기니. 하기야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란 토론에서 상대를 이기기 보다 쉬운 일이지” 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쿠다가와는 같은 1923년 10월호 ‘중앙공론(中央公論)’ 에 게재한 ‘大震雜記(대진잡기)’에서 도 “조선인에 대한 날조된 거짓소문을 믿는 민중을 선량한(바보 같은)시민”이라고 야유하는 등 관동대지진 후 벌어진 일련의 조선인 살해사건에 대해 실망 감을 나타냈다.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黑澤 明)도 그의 자서전인 ‘두꺼비의 기름’에서 중학생 시절 겪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 “평소와 달리 아버지가 수염을 길게 기르고있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가 ‘자경단 폭도들이 나를 조선인으로 오인할까 봐 두렵고 또 네가 동네 우물 옆에 그린 낙서를 마을사람들이 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은 암호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켜 자경단에게 알려질까봐 겁이 나 수염을 길렀다”고 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고있다. 


조선인학살에 대해 당시 일본기독교 계를 대표한 두 사람의 반응이 눈길을 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당시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 전도자, 빈민가의 성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은 인물이며 태평양전쟁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계에도 좋게 알려진 기독교인이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지진발생 다음해 일본 YMCA를 중심으로 여러 사회단체를 묶어 조선인학살참회기도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가졌다.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는 학살사건에 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없다. 그는 평소 “성서해독을 비롯하여 기독교 교리해석은 조선인기독교인이 일본기독교인 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다”고 말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처럼 평소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그가 조선인 학살에 침묵으로 일관하자 조선기독교 계가 실망을 금할 수 없다며 그를 비판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수는 조사기관과 학자들 사이에도 서로 달라 정확한 수를 알기가 어렵다. 학살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에서 수천 명에 이른다는 등 설이 많다. 논픽션 작가인 구도 미요코(工藤美代子) 등 일부 극 우익 성향의 관계자들은 조선인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터무니 없이 축소하고있다. 이들의 학살부인 또는 축소 주장은 지진 직후 호외로 뿌려진 신문보도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연구기관과 나아가 일본정부 당국도 희생자 수에 차이는 있지만 조선인학살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은 옳지않다는 결론을 내리고있다. 지금은 일본의 극우 성향의 중고교 교과서에도 조선인 학살은 사실이라고 실려있다. 자유기고가 가토 나오키는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사람들이 생존해있지 않다고 해서 조선인학살은 없었고 폭동만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역사의 날조” 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있다. 


일본의 ‘민족차별항의행동 및 진실전파행동대’는 “대표적 진보학자인 일본여대의 역사교수 나리타 류잇지(成田龍一)에서 보수파인 도쿄대학의 역사교수인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까지 보수 진보 구분 없이 일본의  정통 역사학자들은 조선인의 학살이 유언비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학자는 한 사람도없다”고 밝히고있다. 다카키 다쿠 동경대교수와 후쿠다 기요토 릿쿄대학 교수도 1960년에 펴낸 공동집필한 ‘ジュニア日本歷史(쥬니어일본역사)’에서 “조선이들이 폭동을 계획하거나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의 불법적인 행위를 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반대로 지진으로 불안감을 느낀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만나는대로 그 자리에서 이유 없이 학살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인지 확실치 않을 때는 일본문자인 ‘ガギグゲゴ(가기구게고)를 읽게해 일본인과 다르면 죽였다”고 쓰고있다. 한국인은 성대의 진동을 수반하는 일본어의 탁음(濁音)발음을 정확하게 하기어렵다. 또한 2008년 자민당정권의 내각부중앙방제회의가 발표한 ‘1923관동대진재보고서 제2편’도 “지진 직후 살상사건은 주로 조선인에 대해 이루어졌다. 군, 경찰, 시민 모두가 예외라고 할 정도의 규모로 무력과 폭력을 행사했다. 일본 재해역사상 최악의 사태이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는 2000년 관동대지진 때 “삼국인(三國人)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경단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출동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삼국인은 조선인과 대만 사람을 가리키는 멸칭이다. 이에 대해 자유기고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는 “지진이 났다고 외국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이해할수없다. 과거의 예로 봐도 지진 때 외국이들이 난동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인들이 외국인이나 소수민족을 공격하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며 이시하라의 발언을 비판했다. 리쿄대학(立敎代學)명예 교수인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는 그의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あとー虐殺の国家責任と民衆責任(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과 그 후 - 학살의 국가책임과 민중책임)’ 에서 “당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잔인했다. 특히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잔인한 방법도 썼다. 그리고 남자는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 나 불 속에 던져 살해 하기도했다” 고 폭로했다. 

  

학살당한 조선인 수에 대해 일본정부중앙방제회의는 2009년에 낸 보고서에서 관동대지진 때 사망 또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05,000여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1퍼센트에서 수(數) 퍼센트’가 살해된 조선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퍼세트면 1,000여 명이고 5퍼센트면 5,000명이 넘는다.  지진이 있었던 1923년 일본내무성경보국조사보고서는 경찰이나 민간인 자경단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231명, 부상 43명, 그리고 같은 해 사법성은 233명으로 발표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살 232명, 지진사망 600명 을 합해 조선인 희생자를 832명으로, 그리고 당시 일본계엄사령부는 254명이라고 했다. 지진 당시 도쿄 주변에 거주한 조선인이 9,800 여명으로 집계 됐으며 이 가운데 6,797명이 각 경찰서와 관청에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학살된 사람은 나머지인 2,464 명 이라는 추정도있다. 


도쿄대학 정치학 교수를 지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지진피해를 입은 관동지방의 77개 시와 마을을 모두 조사한 후 학살된 조선인을 2,613 명이라고했다.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학살당한 조선인을 5,000여 명으로, 그리고 관동대지진조선인희생자추도위원회는 6,000여 명으로 집계하고있다. 정치, 사회, 환경 등 분야를 객관적으로 분석 보도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주간지 ‘週間金曜日(주간금요일)은 “지진 직후인 1923년 10-11월에 걸쳐 실시된 당시의 각종 문헌을 검토한 결과 피살된 조선인은 6,661 명이며 이 가운데 3,240명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고 학살에는 자경단은 물론 군과 경찰 그리고 일반시민들도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관동대지진 이듬해인 1924년 ‘東京高等師範學校附屬小學校初等敎育硏究會修身硏究部(동경고등사범학교부속소학교초등교육연구회수신연구부)’가 역사의 증거로 삼기 위해 관동대진재를 경험한 어린이 100명의 작문을 선정하여 ‘子供の震災記(어린이진재기)’라는 이름으로 출판할 목적으로 당국에 제출했으나 정부검열에서 내용이 대폭 수정되자 발행을 포기하고 수정된 원고를 도쿄도(東京都) 산하의 다른 초등교육연구회에 넘겨 발행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이 수정본에는 조선인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나 학살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이나 ‘조선인’ 이라는 표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조선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朝鮮, 朝鮮人,  鮮人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둑, 탈옥수, 괴짜’ 등으로, 그리고 ‘조선인 습격’을 ‘대 혼란’으로, ‘조선인 폭동’을 ‘야간경찰의 소란’ 등 완전히 다른 말로 바뀌었다.


책 내용의 변경 사실은 조선인 학살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한 한 일본인에 의해 밝혀졌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던 사단법인 ‘ほうせんか(호센카, 鳳仙花)’의 대표 西崎訝夫(니시자키 마사오)씨이다.  니시자키씨는 “ 일본문교당국은 초등교육연구회가 두 번째로 검열을 요청한 원본에 실린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와 학살 등 내용이 너무 과격해 조선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다른 단어로 대체하여 승인해 주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니시자키씨는 “수정되기 전의 원본을 찾기 위해 도쿄시내의 모든 공 사립도서관에 비치돼있는 ‘어린이진재기’를 검토해 본 결과 내용이 모두 같은 수정본 임을 확인하고 원본찾기 활동을 포기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2013년 1월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검열도장이 찍히지 않은 어린이진재기 한 권 발견하고 일반도서관에 비치돼있는 수정본과 비교해 본 결과 조선인에 관한 내용이 그대로 기재돼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고 경위를 밝혔다. 


국회도선관에 보존된 책에 대해 니시자키씨는 “작문집 작성에 관여한 한 교사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훗날 교사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 원본 한 권을 보관하고 있다가 뒤에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당시 일본교육당국은 조선인학살사건이 국제적으로 알려질 경우 일본인의 잔인성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본에는 지금도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색채가 짙게 남아있다.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가르치고 전달하여 다음 세대에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양국간의 관계 개선을 위하는 길” 이라고 강조했다. 


지진 당시 법치의 한계를 넘어선 위태한 상황에서도 300명 가까운 조선인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생명을 지켜준 한 일본 경찰관이 있어 주목을 끈다. 오가와 쓰네기치(大川常吉) 가 그 주인공이다. 관동대지진이 나던 날인 1923년 9원1일 오가와는 가나가와경찰서쓰루미분서(神奈川警察署鶴見分署)서장이었다. 지진 다음 날인 2일 우물에 독약을 넣고 있었다는 조선인을 경찰서로 데리고 온 자경단이 그가 갖고 있던 독약병 이라며 처벌을 요구했다. 오가와 서장은 병을 달라 해 직접 마셨다. 일반 음료수였다. 치안책임은 경찰에 있다고 자경단을 꾸짖어 내쫓아버린 후 인계받은 조선인을 경찰서에 피신시켰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계속 잡혀와 경찰서에 더 이상 숨길 공간이 없어 이들을 인근에 있는 도젠지(東漸寺)사찰로 옮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자경단 1000여 명이 사찰로 몰려와 조선인을 자기들이 처리 하겠다며 내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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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3) 도젠지,조선인을 보호한 사찰


오가와 서장은 자경단 에게 “조선사람들에게 손을 대기 전 나를 먼저 제압한 후 대려가라. 우리 30명 경찰들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사람도 넘겨줄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러자 자경단의 기세가 꺾였다. 조선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면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라는 자경단의 물음에 오가와는 주저없이 “할복으로 용서를 빌겠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자경단이 모두 물러갔다. 조선인 약 300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9월9일 조선인들은 모두 요코하마로 이송 됐다가 다시 고베 항으로 옮겨 일본해군의 보호를 받았다. 오가와 서장은 그 후 정년을 얼마 앞두고 경찰을 떠났다. 오가와는 은퇴 후 “경찰관은 사람을 보호하는 게 임무다. 그 때 일은 당연히 해야할 직무를 수행한 것 뿐”이라고 술회한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오가와는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 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인물로 한국인에게 은인 임에 틀림없다.  


1924년 2월 오가와씨 앞으로 ‘朝鮮人(조선인)’이란 이름으로 감사장이 배달되었다. 이 편지에서 조선인은 스스로 ‘센진(鮮人)’이라고 쓰고있다. 발신자 조선인이 스스로 멸칭과 차별을 뜻하는 센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조선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뜻에서 내린 선택 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통치 아래 있고,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2등국민이었다. 오가와씨가 취한 당시 조치에 대해 일본인들은 지금도 선행의 표상으로 기리고있다. 1995년 재일작가 박경남(朴慶南)씨가 발표한 한 편의 글 ‘ポッかり月が 出ましたら( 두둥실 달이 뜨거든)’ 이 인연이 되어 2013년 오가와 쓰네요시의 손자가 서울의 한 병원으로 부터 초대를 받아 한국을 찾은 적이있다. 할아버지가 한 일에 많은 칭찬이 쏟아지는데 대해 평소 회의를 가졌던 손자는 200여 명의 병원 직원들 앞에서 “당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너무나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한 당연한 일이 미담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드릴 말씀은 이 말 밖에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머리를 숙였다. 회장은 큰 박수로 가득 찾다.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은 나라와 나라가 대립하고 있지만, 나라가 앞장서서 백성을 선동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다수의 일반 국민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라고. 

 

 

하네다공항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일본인 지인S씨가기다리고 있었다혼자 돌아보겠다고 미리 알렸는데도 내가 찾아볼 곳이 도쿄에서 가까워 동행하고 싶어 나왔다고 했다먼저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 가나가와현쓰루미(鶴見)로 향했다쓰루미는 요코하마에서 조금 북쪽의 도쿄만에 인접해있는 작은 항구로 행정상으로는 요코하마시에속한 ()이다바로 앞 도쿄만 매립지는 게이힌(京浜)중화학공업지대이며 쓰루미에는 수십개의 소규모 하청공장이 밀집해 있다관동대지진당시 이 일대는한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쓰루미의 주민은 대부분이 서민인 이른바‘ 시타마치(下町)이다낮은 구릉 인구보산 정상에 관동대지진 때 이 지역에서 사망한 3,300 여명의()을 합장한 묘가 있고 앞에 학살당한 조선인의 영령을 기리는 작은 위령비가 서있다조선인위령비는 지진 당시조선인학살장면을 직접목격한 한 일본인이1974년에 건립한 것이다높이가 2미터 정도인 비석에는 關東大震災殉難朝鮮人慰靈之碑(관동대진재순난조선인위령지비)’라고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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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조선인위령비

 

 쓰루미를 시간 남짓 돌아본후 요코하마시 남구에 위치한 호쇼지(寶生寺)를 방문했다. 지진후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의 영령을 안치할 장소를 찾기위해 조선인 대표들이 쓰루미에 있 는여러사찰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거절당해 실망에빠져있던 중 이 곳 호쇼지가 받아주어 그들의 영령을 봉안할 수 있었다. 속에 파묻힌 사찰은 보기에 규모가 일반 주택과흡사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화강석을 적당히 손질하여 마감한 넓은 비석에는 전면에 關東大震災韓國人慰靈碑(관동대진재한국인위령비)’ 라고 음각돼 있고 면에는 위령비건립에 동참한 200여명의 재일민단 가나가와지부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본 쓰루미에서 죽음의 기로에 처해있던 300명 가까운 조선인을 살려낸 오가와쓰네요시쓰루미 경찰서장이 묻힌 사찰 도젠지(東漸寺)찾았다. 사찰건물은 물론 경내가 정갈했다. 본당 뜰 아래에 그를기리는 원추형모양의 엷은 갈색()가 서 있다. 1m가 조금 넘는 크기의 비석은 조총련계가 1953년에 세운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약 300명의 조선인을 구출한 오가와서장에게 명복을 빈다는 내용을 해서체(楷書體)로 새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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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쓰네기치 서장 추념비비

 

쓰루미 일대의 유적지 순방을 끝내고 도쿄행 전차를 탔다. 도쿄의 대표적인 시타마치인 스미다구 요코쓰나 마을 스미다공원 안에 있는 東京都慰靈堂(동경도위령당)은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신원불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1951년에 세운 석조건물이다. 건물의 정면은 신사(神社)와 같은 모양이고 뒤쪽에 붙여지은 3층 건물의 첨탑은 라마불교의 스투파 같은 모양이다. 위령당 정면 오른 편에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직사각형의 검정색 대리석 단층 위령비와 그 옆에 설명판이 세워져있다. 위령비 전면에 크게 ‘追悼(추도)’ 라는 두 자와 그 아래에 관동대진재조선인희생자 라고 음각돼있다. 그리고 비석을 올려놓은 바닥판에 “이 역사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재일조선인과 굳게 손잡고 일한친선과 아시아평화를 건설하자”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옆 설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 “1923년9월에 발생한 관동대진재의 혼란 속에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육천 여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우리들은 재난 50 주년을 맞아 조선인희생자를 마음 속 깊이 추모한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민족차별을 종식 시키며 인권을 존중하면 선린우호와 평화의 대도로 이어지는 기초를 다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상과 신조의 차이를 넘어 이 비석의 건립에 도움을 준 일본인의 성의와 헌신이 일본과 조선 두 민족에게 영원한 친선의 힘이 되리라 기대한다.” 전시도 아닌 자연재해를 기회 삼아 악랄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자행한 인종청산에 가까운 조선인 살육광란에 대해 정부차원의 공식입장을 한번도 표명하지 않는 나라 일본. 한국과 일본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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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22)자 조선일보 1면에 게재 된
 “작은 비석만 남은 100년전 日 관동 참극" <--여기 클릭
읽으면서

수년 전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있는 곳을 수 일간에 걸쳐 취재한 권태명(경제학과 58학번)동문의 글이 상기되어 찾아  올려드립니다.
유노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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