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說] 日光의 東照宮(Toshogu)을 지은 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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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3-07-29 02:42 조회1,071회 댓글0건본문
2023년7월28일 [解說] 日光의 東照宮(Toshogu)을 지은 理由
[譯者註] 아래의 說明은, 인터넷을 통하여, 모두 日本의 各關連홈페이지에서 拔萃(발췌)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다만, 그런 설명에는 없는 뒷이야기가 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뒷이야기는 따로 추가, 간단히 적고자 한다. 德川家康은, 소위 在職은 불과 3년도 채 못하고 물러난다. 將軍의 職位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뒤에서 子孫萬代의 体制굳히기에 관한 政策導入시행에 苦心한다.
大名(Daimyo)이라함은, 江戶時代에는 主로 一万石以上의 所領을 幕府로부터 받은 武家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이, 領地와 家臣을 거느리는 것을 藩(번, 日本語→han)이라고 불렀으며 全國的으로 藩의 수는 약 260개나 있었다. 藩은 독립해서 정치를 행했다. 이와같이 幕府와 諸藩이 전체로서 政治權力을 만들어내서, 土地ㆍ人民을 지배하는 体制를 幕藩体制라고 부른다. 幕府는 400万石以上을 차지하고, 江戶, 京都, 大坂을 비롯 全國의 주요도시, 港口, 鑛山을 지배하고, 將軍家는 直系家臣, 즉, 旗本, 御家人이라는 이름의 약2만명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全國의 石高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德川秀忠[1578~1632]江戶幕府第2代將軍. 在職1605~23. 家康의 三男. 關ヶ原(Sekigahara)의 戰鬪에서는 父의 미움을 샀으나, 家康의 死後는 그 遺命을 지켜서, 武家諸法度의 制定등 幕政의 整備에 힘썼다. 德川家光[1604~1651]江戶幕府第3代將軍. 在職1623~51. 秀忠의 二男. 家康ㆍ秀忠의 遺志를 이어서, 武家諸法度ㆍ參勤交代制등을 整備하고, 幕政의 基礎를 構築했다. 또한 기독교인을 彈壓해서 鎖國体制를 强化했다.
德川家康이 天下統一後 초기에 가장 勞心焦思한 것은, 初期出帆虛弱체질의 德川幕府를 보호하고, 体質强化의 妙策을 찾는 것이었다. 初期에는 諸藩이 作黨해서 幕府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위험이었다. 그런 위험을 애당초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大名을 3種類로 분류해서, 相互ㆍ牽制ㆍ監視케 하고 만약 異常한 움직임이 보이면 幕府로 일러바쳐 고자질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3종류의 大名은, 家康의 親族을 임명한 경우는 親藩(shimpan), 家臣重臣을 大名으로 임명한 경우는 譜代(fudai), 豊臣秀賴 와 家康이 天下를 놓고 싸울때에 家康쪽에도 豊臣쪽에도 가담을 하지 않은 중립을 지켰던 藩主를 大名으로 임명하는 경우는 外樣(tosama)이라고 불렀다.
이들 3종류의 大名을 고르게 섞어서 全國에 포진시켰다. 서로 內通作黨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들을 相互監視케 한 것이었다. 그러고서도 安心이 안 되자, 家康은, 유언으로, 諸藩으로 하여금, 東照宮을 짓는다하여, 財物을 받치도록---(힘을 뽑아버리는)---大運動을 전개케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므로서, 諸藩이 재물을 備蓄, 즉 힘을 모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힘이 빠져야, 幕府에 대한 모반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 아니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財物이 幕府로 답지하여, 그 돈을 유감없이 金붙이까지 장식하면서 東照宮에 발라붙여서 지은 것이 바로 日光東照宮이다.
그래서 유난히 화려하게 지었다. 大名의 뼈골을 뽑아서 지은 것이라고 보면 잘못이 없다. 그리고, 여러분이 東照宮의 주변을 돌아보면 1000개가 넘는, 사람의 키만한 높이의 石燈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金붙이가 없는 者는 石燈이라도 깍아만들어서 진상케 한 것이었다. 목적은, 德川家康을 모시는 祠堂을 짓되, 이것을 빙자해서 이번에 大名의 힘을 모두 뽑아버리자는 그런 計算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東照宮은 家康의 死事後, 곧 工事를 시작해서 1年5個月만에 完工을 한다. 東照宮은 幕府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런 政治的 理由도 숨어있는 大工事였다-解說: 2014-07-13 jgchoi]
◆ 東照宮은 어떤 곳인가?
德川家康(1542~1616)을 모시는 神社. 처음에는 東照社라고 불렀다. 家康은 1616년 사망하자, 처음에는 久能山에 묻혔으나, 日光에 社殿이 지어져 東照大權現으로서 奉齊. 1645년 宮號를 받게되고, 全國의 社도 東照宮이라고 改稱했다. 權現(Gongen)이라함은, 佛ㆍ菩薩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귀신의 모습을 취해서 나타나는 것, 또는 佛ㆍ菩薩의 모습으로 化身해서 나타나는 日本의 神. 熊野權現ㆍ金毘羅權現등이 그런 例이다.
德川家康[1542~1616]은, 江戶幕府初代將軍. 在職1603~05, 3년이 채 안 된다. 松平廣忠의 長男. 織田信長과 동맹을 맺고 駿河를, 豊臣秀吉과 和親해서 關東을 支配. 豊臣氏五大老의 筆頭(→가장 먼저 이름을 쓰는 것, 즉 首席)가 되었고, 秀吉의 死後, 石田三成를 關ヶ原(Sekigahara)의 戰鬪에서 擊破하고, 1603年, 征夷大將軍(→鎌倉時代以後, 幕府의 主宰者의 職名, 즉 天皇의 다음 職位. 鎌倉幕府를 열었던 源賴朝以後, 室町幕府의 足利氏, 江戶幕府의 德川氏까지 이어졌다)이 되어서, 江戶에서 幕府를 열었다. 아들 秀忠에게 將軍職을 물려준 후, 駿府(Sunpu→지금의 靜岡市)로 隱退했다. 大坂의 陣에서 豊臣氏를 滅亡시키고, 武家諸法度등을 制定해서, 幕政의 基礎를 構築했다. 東照大權現이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다. 栃木(Tochigi)縣日光市에 있는 神社. 祭神은 德川家康을 主神으로 하고, 源賴朝ㆍ豊臣秀吉을 配祀한다. 1617年에 駿河의 久能山으로부터 家康의 靈을 옮겨서 모신 것이 始作이다. 1999年「日光의 社寺」의 하나로서 世界遺産(文化遺産:http://www.mct.gr.jp/world_h/)에 登錄되었다.
所在地 栃木縣日光市
主祭神 德川家康公
(相殿): 豊臣秀吉(1536~1598)公ㆍ源賴朝(1147~1199)卿
創建: 1617年)
日光東照宮(Nikko Toshogu)는 栃木縣日光市에 있는 神社. 江戶幕府初代將軍ㆍ德川家康을 神格化한 東照大權現을 祀한다. 日本全國의 東照宮의 總本社的 存在이다. 正式名稱은 地名等을 冠稱하지 않는 「東照宮」이지만, 他의 東照宮과의 區別을 위해, 「日光東照宮」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東國의 精神的 中心으로서의 歷史는, 德川氏의 東照宮보다도 훨씬 이르고, 늦어도 源義朝(Minamoto Yoshitomo, 1123~1160)에 의한 日光山造營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源賴朝(Minamoto Yoritomo, 1147~1199)가 그의 어머니의 熱田大宮司家의 出身者를 따로 둔 以來, 鎌倉幕府, 關東公方, 나중에 北條氏의 歷代를 通해서 東國의 宗敎的權威의 一中心으로 계속되었다. 德川氏의 東照宮造營은 그 歷史를 교묘히 利用했다고 생각된다.
1616年 4月17日, 德川家康은 駿府(sunpu, 現在의 靜岡市)에서 死去했다. 遺骸는 遺命에 의해 곧 駿河國의 久能山에 埋葬되었으나(久能山東照宮), 翌年에 下野國ㆍ日光으로 改葬되었다. 同年4月에 社殿이 完成되고, 朝廷으로부터 東照大權現의 神號와 正一位의 位階의 追贈을 받고, 4月8日에 奧院廟塔에 改葬되었고, 4月17日에 遷座祭가 行해졌다. 또한, 改葬의 때에, 吉田神道와 山王神道의 어느 쪽에서 모실까가 論爭이 되었으나, 天海가 主張한 山王一實神道가 採用되어, 藥師如來를 本地佛로 하는 神佛習合에 의해 祭祀되게 되었다.
1634年에는, 9月에 3代將軍ㆍ德川家光이 日光社를 參拜하고, 1636年에는 1644年 神忌를 向해서 社殿의 大造營에 着手한다. 翌1637年에는, 江戶에 來訪한 朝鮮通信使가 對馬藩主宗氏의 要請으로 日光參詣를 行하였고, 將軍家의 政治的威光에도 利用되었다. 1645年에 朝廷으로부터 宮號가 授與되어 東照社에서 東照宮으로 改稱되었다. 國家守護의 「日本之神」으로서, 翌年의 例祭로부터는 朝廷으로부터의 奉幣(→神에게 幣帛을 드리는 것)가 恒例가 되었고, 奉幣使(日光例幣使)가 派遣되었다.
家康이 日光에서 祀받기로 된 것은, 家康本人의 遺言 때문이다. 家康은 遺言中에 「遺体는 久能山에 묻고, (中略) 一周忌가 지나면, 日光山에 작은 堂을 세워서 勸請해서, 神으로서 모실 것. 그리고, 八州의 鎭守가 되겠다」고 말했다. 家康이 지향한 「八州의 鎭守」이함은, 「日本全土의 平和의 守神」이다. 家康은, 不動의 北極星의 位置로부터 德川幕府의 安泰와 日本의 恒久平和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明治初年의 神佛分離政策에 의해, 日光은 神社의 東照宮ㆍ二荒山神社, 寺院의 輪王寺의 二社一寺의 形式으로 分立되었다. 現在도, 一部의 施設에 대해서 東照宮과 輪王寺의 間에 歸屬에 대해서 係爭中의 것이 있다. 1873年에 別格官幣社에 配列되었고, 第二次世界大戰後는 神社本廳의 別表神社가 되었으나, 1985年에 神社本廳을 벗어나서 單立神社가 되었다. 가장 가까운 驛:東京의 淺草驛에서 東武日光線(135.5km)을 이용ㆍ東武日光驛, JR東日本日光線ㆍ日光驛에 下車한다. 1867년 明治維新으로 幕府政治에서 天皇制로 복귀한 日本은, 비록 金붙이까지 발라붙여서 잘 지은 東照宮이지만, 德川家康을 모신다는 東照宮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대접을 잘 받지 못하고 있다. 政治가 作用하고 있는 것이다. 2023-07-28, 서울商大16回 최정규 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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