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6월21일 [崔正珪칼럼] 幕末 美國에서 제대로 敎育받은 日本人 『John 万次郞』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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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6-21 16:13 조회21회 댓글0건본문
2026년6월21일 [崔正珪칼럼]
幕末 美國에서 제대로 敎育받은 日本人 『John 万次郞』은 어떤 사람인가?
●<譯者註: 日本近世史에서 재미있는 逸話를 소개한다 >
1841년 한사람의 日本人이. 바다에서 고기잡다가 조난, 無人島 표착후, 美國 捕鯨船에 救助되어, 美國行, Masachusetts Fairhaven에서 中高校→大學卒後, 1851년 歸國한다. 그후, 幕府(當時政府)의 부름을 받고, 1853년 Perry黑船來航, 美日通商交涉에서 譯官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日本人으로서 美國의 定規高等敎育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이 사람이 最初다. 美國이 救助, 大學敎育까지 받게해서 日本으로 돌아오도록 한 것, 日本으로서는 돈한푼 투자하지 않고 공짜로 美國이 만들어준 것, 史上初有의 놀라운 異例의 사건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더 알아보기로 하다.
美日開國交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歷史的 人物로서 『John Manjiro』에 관한 2006년 朝日新聞記事를 옮긴다. 요새말로 하자면, 早期留學과 幸運이 成功한 사례다. 14세때 바다로 고기잡으로 나갔다가 조난, 美國의 포경선에 救助되었고, 當時 船長의 눈에 들어, 美國行. 船長이 아들처럼 키우고 교육시켜 美國에서 中高校-大學까지 졸업한다. 25세때, 日本으로 돌아온다. 그후 日本을 위해 美國과의 國交交涉에서 英語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어서, 훌륭한 역할을 해낸다. 後日 東京大學에서 교수가 되어 가르친다.

●[朝日新聞] John万次郞가 살던 家, 修復키로 美Massachusetts
朝日新聞 2006年12月11日09時27分
漂流의 끝에, 美國으로 건너가 敎育을 받고, 幕末로부터 明治維新에 걸쳐서 通譯, 敎師로서 活躍했던 John Manjiro(→本名:中浜万次郞, [1827~98])가 살았었던 美東部 Massachusetts州 Fairhaven의 집이 修復되기로 되어, 8日, 現地에서 記念의 event가 있었다. 現在의 高知(Kochi)縣土佐淸水市出身의 漁師(=漁夫)였던 万次郞는 1841年, 漂流하다 漂着한 鳥島(Torishima-東京都)로부터 美國의 捕鯨船에 救出되어, William Whitfield船長과 함께 43年에 美國으로 건너가 船長의 집에서 一時몸을 맡겼다. 當時는 木造2階建이었으나, 새로이 아래에 1階部分을 追加해서 지금은 3階建이 되어 있고, 3階에서 万次郞가 살았던 방이 當時와 변함없이 남아있다. 約20年前부터는 無人이었으나, 美國의 非營利團體「万次郞歷史友好協會」의 Danial Green會長(50)이 買受하여, 美日의 歷史를 알리는 建物로서 修復하기로 했다.
Green會長은 歸國한 万次郞가 日本의 開國을 둘러싼 交涉에서 活躍한 것을 參考的인 證據로서「여기는 美日友好의 誕生의 地。2人의 人間의 單純한 友情이 歷史를 움직였다. 親切과 友情이 世界를 바꿀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敎育의 場이 된다면----」이라고 말했다. Event에서는, 美日友好를 위한 活動하는 사람들 約40人이 모였다. (終)
●美國의 Asia로의 進出
産業革命(1733~1840)을 맞이한 西歐各國은, 大量生産된 工業品의 輸出擴大의 必要性에서, 印度를 中心으로 東南Asia와 中國大陸의 淸나라로 市場擴大를 서두르고 있었으나, 나중에 그것은 熾烈한 植民地獲得競爭이 벌어진다. 1492년 Columbus의 新大陸發見과, 1498년에 Europe에서 Africa를 돌아 印度까지 航海路을 發見한 Vasco da Gama等에 의해서, 地球球体說에 基해서 우리들이 사는 大地, 즉「地球가 球体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歐州各國은, 大航海時代가 到來하여, 英國, 프랑스, Spain으로부터 독립한 和蘭과 같은 後發諸國이 Spain과 Portutal 이 쇠퇴하자, 戰爭등으로 各地를 獲得하고 있었다, 淸日戰爭이 시작되기 以前,
幕末當時는, 市場擴大競爭에는 英國優勢의 아래, 프랑스도 앞서갔고, 印度와 東南Asia에 據点을 갖지않은 美國은 뒤쳐져 있었다. 當時의 人口는, 美國이 1833年에 約1,416万人, 淸이 約4億人, 日本이 1834年에 約2,760万人이었다. 美國은, 1835년 東印度艦隊를 設立한다. 阿片戰爭後인 1842年에 淸과의 間에 條約을 締結하고, 淸國市場에 進出하게 된다.
●捕鯨船의 物資補給을 目的으로 한 寄港地의 確保
産業革命(1733~1840)에 의해서 歐美의 工場과 Office는 밤늦게까지 稼動하도록 되었고, 그때의 潤滑油와 Lamp의 燈火로서, 주로 고래의 鯨油가 使用되었다. 지금처럼, 石油가 발견되어 공급이 없었던 때다. 이 需要를 감당하기 위해, 歐美의 各國은 日本沿岸을 포함한 世界中의 바다에 捕鯨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日本近海와 Kamchatka半島東方은 好漁場으로서 알려졌었다. 美國東海岸을 基地로 하는 捕鯨船은 1年以上의 航海를 行하는 것은 普通이었다. 當時의 捕鯨船은 船上에서 鯨油의 抽出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大量의 장작과 水가 必要했고, 長期航海用의 食料도 포함해서, 太平洋에서의 補給據点이 要求되고 있었으며, 美國도 例外는 아니었다, 追加해서 難破船의 問題도 있었다. 漂流民의 保護는 當時의 美海軍의 任務의 하나였었고, 1849年에는 James Green이 難破한 美國捕鯨船乘組員을 引受하기 위해 長崎에 來航하기도 했다. 그費用의 觀点에서도, 太平洋에 面하는 日本과 條約을 締結하는 것이 有利하였다.
美國은 이미 1846年에 英國과의 交渉으로 Oregon의 南半分을 領土로 차지하고 있었으나, 1846年~1848年의 美Mexico戰爭으로 Californai를 獲得했다. 이에 의해 美國은 太平洋國家가 되었고, 巨大市場인 淸과의 貿易開拓이 國家目標가 되었다. 美西海岸으로부터 中國에 이르는 最短航路는, 西海岸으로부터 北上해서, Aleutian列島・千島列島를 따라 南下, 津輕海峽과 對馬海峽을 通過해서 上海付近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津輕海峽을 面한 箱館에 補給據点을 두는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美Mexico戰爭에서의 勝利에 의해서 그때까지 主力艦隊이었던 Mexico灣艦隊의 必要性은 低下하고, 海軍은 組織規模維持를 위해서 東印度艦隊의 役割을 擴大할 必要가 생겼다.
黑船來航은, 1853年에 Matthew Perry提督이 지휘하는 美國海軍東印度艦隊의蒸氣船2隻을 포함한 艦船4隻이 日本에 來航하여, 開國通商을 요구한다. 艦隊는 東京灣入口의 浦賀(神奈川縣橫須賀市浦賀)앞바다에 停泊하고, 一部는 測量을 한다하여 東京灣 깊숙이까지 侵入했다. 結果, 幕府는 Perry一行의 久里浜에의上陸을 허가하고, 거기서 美國大統領國書가 幕府에게 건네지고, 翌年의 美日和親條約締結에 이르렀다. 日本에서는 주로, 이 事件으로부터 大政奉還까지를 「幕末(1853~66)」이라고 부른다.
【譯者註: 近代日本의 開化期에 國家運命을 바꿔놓았다고도 볼 수 있는 事件의 主人公, John Manjiro(본명: 中浜万次郞=Nakahama Manjiro)에 관한 기사등을 解說한다. 그리고 몇 군데 參考資料를 日本과 美國등에서 검색해서 보충했다. 近代日本의 歷史를 알려면, 1853년 어떻게 美國의 Perry提督의 艦隊가, 완고한 德川幕府를 說得할 수 있었는가? 하는 裏面史도 알게 된다. 1841년, 當時 14歲, 漁夫의 아들이었던 万次郞가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난파해서 표류하다가, 美國의 고래잡이漁船에 구조된 것, 그리고 船長인 William Whitfield를 만나, 그 사람의 好意로 美國으로 건너가, 初中高大學까지 완전한 美國의 公敎育을 받았고, 10年後 日本으로 歸國해서, 各種의 美國과의 協商等에 일본측의 譯官으로 활약했고 美國의 長点, 즉 新敎育인 英語, 航海術, 數學等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薩摩(Satsuma)의 領主가 세웠던 학교, 開成學校(Kaisei College)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 開成學校는 後日 東京大學으로 改稱합병, 現在의 東京大學의 母體가 된다. 이런 人物이 바로 John Manjiro이다.】
●John万次郞의 一代記
John万次郞(本名, 中濱万次郞)는, 1827年1月1日에 土佐의 中濱, 지금의 高知縣土佐淸水市中濱에서 가난한 漁夫의 次男으로서 태어났다. 9歲의 時에 父親을 잃고, 万次郞은 어렸때부터 돈일 스스로 벌어야했다.
1841年 14歲였던 万次郞는 친구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로가서 遭難. 數日間 漂流한 後, 太平洋에 떠있는 無人島「鳥島」에 漂着한다. 万次郞등은 거기서 過酷한 無人島生活을 보냈다. 漂着으로부터 143日後, 万次郞는 동료와 함께 美國의 捕鯨船 John Haround號에 의해서 救助된다. 이때의 만남이 万次郞의 人生을 크게 바뀌게 된다.

救助되었지만, 當時의 日本은 鎖國을 하고 있었고, 外國의 船은 容易하게 접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歸國한다해도 生命의 保證은 할 수 없었다. John Haround號의 船長 Whitefield는, 万次郞를 제외한 4人을 安全한 Hawaii에 내려주고, 万次郞가 마음에 들었던 船長은, 美國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하고 万次郞에게 意志를 물었다. 万次郞도 美國으로 가고싶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船長과 함께 美國으로 가기로 決斷하였다. 이 時, 船名에서 따와서, John Man이라는 愛稱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万次郞는 美國의 땅을 밟게 되었다. 美國으로 건너간 万次郞는 Whitefield船長의 養子가 되어, Masachussetts州 Fairhaven에서 함께 생활한다. 學校에서, 英語∙數學∙測量學∙航海術∙造船技術등을 배운다. 万次郞는 首席이 될 정도로 熱心히 勉學에 몰두하였다. 卒業後는 捕鯨船을 타고, 數年의 航海를 거친 後 日本으로 歸國하기로 決意. 歸國資金을 벌기위해 万次郞가 向한 곳은, Gold Rush가 일어난 Caliofornia. 金鑛에서 資金을 모아, Hawaii의 漂流同僚를 만나러 간다. 거기서 歸國準備를 해서, 日本을 向해서 出航하는 것이다.

1851年 薩摩藩領의 琉球(現:沖繩縣)에 万次郞는 上陸한다. 万次郞등은 番所(=관청)에서 尋問後에 薩摩本土로 보내졌고, 薩摩藩과 長崎奉行所등에서 長期에 걸쳐서 尋問을 받았다. 그리고 1853年 歸國으로부터 約2年後에 土佐로 돌아올수 가 있었다. 土佐藩에서는 公式의 記綠으로서 「漂客談奇」에 記錄되었고, 土佐15代目 藩主山內豊信(容堂)의 命에 의해 蘭學의 素養이 있는 繪師-河田小龍가 심문을 行한다. 이때 河田小龍에 의해서 마무리된 것이 「漂巽紀略全4冊」이다. 漂流로부터 美國등에서의 生活을 거쳐서 歸國하기까지 총정리했고, 繪師의 揷繪가 많이 포함된 책이다. 土佐藩主山內容堂公에게도 獻上되었고, 많은 大名(→10,000石以上의 藩主)들도 寫本을 보았고, 2年後 河田小龍를 찾아온 坂本龍馬와 ㅤㅁㅣㄶ은 幕末志士들도 보았슴에 들림없다고 생각된다.
그 後, 高知城下의 藩校「敎授館」의 敎授가 된다. 後藤象二郞, 岩崎彌太郞等이 直接指導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万次郞는 幕府에 招聘을 받아 江戶(=東京)으로 간다. 幕府直參이라는 벼슬을 받는다. 그때, 故鄕;인 中濱을 姓으로서 받았고, 中濱万次郞이라고 일컫도록 되었다. 이런 異例의 出世의 背景에는, Perry來航에 의해 美國의 情報를 必要로 하고 있던 幕府가 있었다. 万次郞는 江川英龍의 밑에서 飜譯과 通譯 造船指揮, 人材育成에 精力的으로 일했다. 그러나, Spy疑惑으로 Perry의 通譯에서 排除되었다. 그러나, 万次郞의 知識을 必要로 하는 志士는 많고, 万次郞에게 英語와 航海術을 배우러 오는 사람은 많았다고 한다.
1860年 万次郞는, 美日修好通商條約의 批准書交換을 위해서 美國으로 가는 使節團에 들어간다. Pohattan號의 隨行艦「咸臨丸」의 通譯 技術指導員으로서 乘船하게 된다. 이 軍艦∙咸臨丸에는, 艦長인 勝海舟와 福澤諭吉등 歷史的으로 重要한 人物들도 타고 있었다. 그 後, 捕鯨活動, 小笠原開拓, 開成學校 敎授就任등 눈부신 活動을 계속한다. 1870年, 普佛戰爭視察團으로서 Europe에 派遣된다. New York에 滯在했을 때, Fairhaven을 찾아간 万次郞는 約20年만에 恩人이었던 Whitefield船長과 再會할 수 있었다, 그리고 歸國後, 万次郞는 病으로 쓰러진다. 그 以後는 조용히 살게 된다. 그리고 1898年 71歲로 万次郞는 그의 生涯를 마감한다. <終>
2026-06-21, 오후 15:40, 새로이 再作成 16回 j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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