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1월1일 1400年前의 則天武后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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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1-02 10:52 조회112회 댓글0건본문
2026년1월1일 1400年前의 則天武后는 어떤 사람인가?

●●●唐나라는, 唐(618年~907年=289年)은 中國의 王朝다, 李淵이 隋를 滅亡시키고 建國했다. 7世紀의 最盛期에는 中央Asia의 砂漠地帶도 支配하는 大帝國이었고, 中央Asia와 東南Asia, 北東Asia諸國(韓半島와 渤海, 日本등)에 政制와 文化등의 面에서 多大한 影響을 미쳤다. 首都는 長安에 두었다.
◆◆◆武則天의 원래 이름은, 武照, 624년에 태어나, 705년에 81歲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02年前의 일이다. 그당시의 醫療수준으로 81세까지 살다가 갔다는 갓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아마 120세정도는 살았다고 본다. 아래의 年表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난 25년12월24일, 中華TV(channel77)에서, 則天武后를 처음 방송하는 것을 시청하였다. 平日오후8시~1시간 2월17일까지 방송한다. 筆者는, 則天武后를 전혀 모른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唐나라初期때의 사람, 그당시는, 지금처럼, 一流大學도 없었고, 제대로 된 敎育機關도 없었다. 12살 때 父가 死去하자, 14살 때, 唐太宗의 侍女로 입궁한다. 太宗 李世民이 그녀의 總名明晳함에 감탄, 태자(後日 高宗)에게 추천한다. 太宗과는 出産이 없었으나, 高宗과는 아들3, 딸1를 두었다. 첫아들은 病死, 둘째가 中宗, 그리고 楊貴妃와 艶聞으로 유명한 玄宗은, 則天武后의 孫子다. 頭腦가 너무 좋아서 가히 天才하고 해도 過言아니라고 생각한다. 14세때 入宮, 81세까지 宮中에서 살다가 세상떠났다. 侍女로 들어와서, 宮中의 온갖 음모술수를 이겨내고, 政敵을 제거해가면서 살아남아, 690~705년=15年間은. 女子皇帝로서 在位했다. 末年에 아들, 中宗에게 讓位하고 세상을 편안히 떠났다. 그 시대는 사진도 그림도 없다.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으로서 이렇게 福 많은 사람 있을까? 놀라운 一生, 성공한 Success Stor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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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存期間 在位期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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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初代 唐高祖(李 淵) 566~635=享年69歲 →在位 618~626=8年間
②二代 唐太宗(李世民) 598~649=享年51歲 →在位 626~649=23年間
③三代 唐高宗(李 治) 628~683=享年55歲 →在位 649~683=34年間
④則天武后(武媚娘) 624~705=享年81歲 →在位 690~705=15年間
(周나라 女皇帝)
⑤四代 唐中宗(李 顯) 656~710=享年54歲 →在位 684~690=6年間 Plus
705~710=5年間=合計11年間
⑥五代 唐玄宗(李隆基) 685~762=享年77歲 →在位 712~756=44年間
⑦楊貴妃 719~756=享年37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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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에서 唯一의 女帝」라는 壯擧도 있고, 武則天의 사람됨됨이를 傳하는 이야기가 많다. 武則天이 태어나서 얼마 안 되었을때, 袁天綱이라는 名道士가 와서 그女의 相을 占을 보았을때, 人相을 본 袁天綱이「이 아이는 반드시 하늘로 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傳承이 있다. 이 傳承에 의하면, 父가 將來의 皇后가 될 것을 期待해서 武則天에게 高度의 敎育을 했고, 別名을 媚라고 命名한 理由에는, 乳兒로서의 武則天의 容姿가 極히 아름다웠던 것 뿐만 아니라, 그의 予言을 믿었던 것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史書가 傳하는 바에 의하면, 少女期의 武照는 漆黑의 두발, 特徵的인 길게 째진 눈, 雪같이 흰 피부, 桃色의 혀, 薔薇色의 얼굴, 커다란 가슴, 보는 者를 魅了하는 媚笑, 그리고 聰明한 頭腦를 兼備하고 있다는 것이다.
◆◆◆武則天은, 624년, 唐初時代의 政治를 담당했던 貴族集團中에서는 傍流에 속하는 家系에서 태어났고, 代代로 財産家였기때문에, 어렸을 때의 武則天은 父로부터 高度의 敎育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12歳의 때에 父가 死去하자, 637年, 14세때에 太宗의 後宮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宮中에 들어온 그녀는 聰明明晳함으로 소문이 나서, 太宗이 媚娘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
◆◆◆太宗의 病이 重態에 빠지자, 看病한 皇太子李治(後의 高宗)과 初対面하고, 皇太子는 첫눈에 반했다. 649年 太宗의 崩御와 더불어, 武媚娘등 모든 宮女들은, 感業寺라는 절에 女僧으로 出家하게 되었다. 先皇의 宮女는, 先皇이 죽으면, 궁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는 道士가 되어 道敎寺院에서 修行하고 있던 중, 1年後, 寺院을 訪問한 高宗과의 再会가 이뤄어졌다. 이 무렵의 高宗은, 皇后王氏와, 高宗이 寵愛하고 있던 淑妃가 対立하여, 皇后는 高宗의 寵愛를 淑妃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高宗에게 武媚娘의 入宮을 推薦했다. 武媚娘이 昭儀(九嬪의 하나, 正二品)으로서 後宮에 入宮하자, 高宗의 寵愛는 王皇后가 노렸던 대로 淑妃로부터 멀어졌으나, 王皇后自身도 高宗으로부터 疎外되게 되었다.
◆◆◆高宗은, 武媚娘을 昭儀에서 새로이 宸妃로 昇格시키려고 했으나, 宰相等의 反対로 實現하지 못했다. 同年, 李義府등의 側近이 皇后廢立과 武媚娘擁立의 뜻을 上疏하자, 大臣들이 結託해서 高宗에게 武媚娘立后의 上奏文을 올렸다. 10月13日, 高宗은 詔書으로, 「陰謀下毒」의 罪를 물어 王皇后와 淑妃의 2名을 庶民으로 떨어뜨리고 罪人으로서 投獄한 것, 그라고 同2名의 親族은 官位剥奪과 上嶺南으로의 流罪에 處할 것을 宣告했다. 그 7日後, 高宗은 再次 詔書를 發布하고, 武照를 立后하였다. 11月初旬, 皇后가 된 武照는 監禁되고있던 王氏(前皇后)와 蕭氏(前淑妃)를 棍杖으로 百대를 處한 다음, 惨殺했다.
◆◆◆垂簾政治
武照는 高宗에 대신해서 垂簾政治를 行했다, 武照는 自身에 対한 有力貴族의 積極的支持가 없다고 自覚하고 있었기 때문에, 自身의 權力을 支持하는 人材를 新興富裕層에서 積極的으로 登用했다. 武皇后는 人材의 採用에 있어서, 身分뿐만 아니라 才能과 自身에의 忠誠心을 重視했다. 660年, 新羅의 請願을 받아들여 百濟討伐의 軍을 일으켜서, 百濟를 滅亡시켰다. 倭國(日本)・旧百濟連合軍과 劉仁求가 이끄는 唐軍이 戰鬪한 白江口의 戰鬪(白村江의 戰鬪에서도 勝利하고, 그 5年後에는 孤立化된 高句麗를 滅亡시켰다. 武照는 딸 太平公主와 薛懐義・張易之・張昌宗兄弟와 같은 自身의 寵臣, 親族의 武氏一族을 重用하고, 他方으로 高宗의 他女人과의 사이에 낳은 皇太子를 줄줄이 殺害하였고, 高宗은, 宰相을 불러서 武照의 廢后를 計劃했으나, 武皇后는 計劃을 事前에 察知하고, 皇帝를 妨害하는 專横을 계속했다. 高宗의 晩年, 病을 얻었을 때 鍼治療를 希望했으나, 武照는 治療를 中止시켰다. 683年, 高宗이 崩御하자 太子인 李顕(中宗)이 即位하지만, 中宗의 皇后韋氏가 血縁者를 要職에 登用한 것을 理由로, 太平公主를 利用해서 中宗을 廢位하고, 그의 弟인 李旦(睿宗)을 新皇帝로 擁立했다. 睿宗은 武后의 權勢의 下, 傀儡를 堪耐하는 것을 强要당했다.
◆◆◆唐의 宗室의 擧兵울 打破한 後, 武后는 女帝出現을 暗示하는 預言書(佛典中의 『大雲經』에 仮託해서 創作된 疑經)을 全土에 流布시켜, 그리고 周代애 存在한다고 하는「明堂」(聖天子가 여기서 政治를 行했다)를 宮城内에 建造시켜, 權威의 强化를 圖謀하고, 帝位簒奪의 準備를 行했다. 690年, 武后는 스스로 帝位에 就任했다. 國號를「周」라고 하고, 스스로를 聖神皇帝라고 稱하고, 天授를 改元했다. 睿宗릉 皇太子로 格下되었고, 李姓에 대신해서 武姓을 授與하였다. 이 王朝를 「武周」라고 부른다(國號는 周이지만, 古代의 周와 北周등과 區別하기 위해 이렇게 부른다).
◆◆◆ 武則天의 治世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役割을 해낸 것이, 高宗의 時代로부터 그女가 實力을 보여준것은, 重用하고 있던 稀代의 名臣인 狄仁傑이다. 武則天은 狄仁傑을 宰相으로 登用하고, 그의 的確한 諫言을 받아들여, 國内外에서 發生하는 難題의 處理에 当하여, 成功을 거두었다. 또한 治世後半期에는 姚崇・宋璟등의 實力을 꿰뚫어보고 이것을 要職에 抜擢했다. 後에 이 2名은 玄宗의 時代에 開元의 治를 支持하는 名臣이라고 稱받는 人物이다. 武則天의 治世의 後半은, 狄仁傑등의 推擧에 의해 数多의 有能한 高級官僚를 登用했다.
◆◆◆晩年의 武則天이 病床에 누워있게 되자, 宮廷内에서는 唐復活의 機運이 높아지고, (武則天은 武姓을 집착해서 甥(조카)의 武承嗣(698年没)에개 帝位를 譲位하려고 했으나, 「子를 제치고 甥에게 譲位하는 것은 礼에 反한다」는 狄仁傑의 反対로 断念하였다. 当時, 武則天의 寵愛를 받고 横暴를 極化한 張易之・張昌宗兄弟를 除去하기 위해서, 705年2月22日, 宰相인 張柬之는 中宗을 東宮으로 맞이하고, 兵을 發해서 張兄弟를 斬首하고, 武則天에게 則天大聖皇帝의 尊稱을 바칠 것을 約束하고 皇位를 물러나게 했다. 이것에 의해 中宗은 復位하고, 國號도 唐으로 復元하게 되었다. 그 後 곧 武則天은 崩御하고, 706年5月, 乾陵에서 高宗과 合葬되었다. 唐代의 帝陵은, 代始의 大亂을 이겨내고도 사그러들지 않는 兵亂의 中에, 盗掘당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乾陵만은 發掘予定의 夏에 激한 雷雨가 여러날 계속되어, 不成功으로 끝났다고 한다. <終> 2026-01-01 jgchoi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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