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노상의 걸어온 길--연보 형식의 자서전--맺는 말 (경제과 58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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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4-06-20 16:48 조회630회 댓글0건본문
유노상의 걸어온 길
-연보 형식의 자서전-
맺는 말
1. 내 나이 70이 되는 시기에 나는 나 자신보다는 이제 내가 세상에 없을 때의 나의 자손들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여 보았다. 내 자손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즉, 내 자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기초는 ‘자신들이 어떻게 태어났느냐’를 아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새로운 가계보」다.
나는 남성 중심으로 되어있는 족보의 개념을 뛰어넘어 남녀가 완전히 대등한 혈통가계보를 3년여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 그리하여 꼭 12년 전에,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든 고손주까지의 자손들, 그리고 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고손주까지의 자손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새로운 가계보'는 당내 일가를 구성하는 후손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혈육 간의 유대를 굳건히 할 뿐만 아니라 사랑(仁愛)의 가풍을 이어받아 화기애애한 가계가 되는 밑거름으로 크게 쓰일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또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 내 할머니 이인애(李仁愛)권사님에 대한 막내 손주의 도리이기도 하다.
나는 기독교 모태 신앙인이며, 2녀 3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부모님 누님 형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빚에 보답하기 위해, 평생을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고 높이는 데 힘써 왔다. 나는 한글을 배우기 전 서산감리교회 유치부에서 노래로 성경을 암송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압축하여 간결하고 분명하게 표현된 말씀의 노래다. 나는 지금도 가끔 걸으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
기독교 신앙의 바탕에서 내 형제들의 우애는 참으로 견고했다. 한 번도 돈이나 재산 문제로 서로 의견이 엇갈린 일이 없었다. 그 영향을 받아 내 조카들도 서로 도타운 사이를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훌륭하다. 이 신앙은 내 두 딸이 권사이고 두 사위는 장로 안수집사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느니 하나님 은혜로다.
문화유씨충경공파판윤공종중서산종회(文化柳氏忠景公派判尹公宗中瑞山宗會)는 내가 큰형님 생전에 형님과 의논하여 장손 지훈이가 추진하고 등록하는 일 등 실무를 담당하여 수고하였다. 이 종회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금도 스스로 모으고 일 년에 여러 번 모여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 일에 사랑하는 딸 은아가 총무로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있어서 매우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한다.
2. 이 책 ‘유노상의 걸어온 길’은 지난 10년간 짬짬이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정리하여 보기 편하도록 연보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내 사랑하는 딸 은아 경아 내외와 내 강아지 찬희 준영 서영에게 주기 위하여 이 자료를 힘써 정리했다. 고령에 접어드니 힘도 들고 지병도 생겨 좀 체력이 달리기도 한다. 두 딸 내외의 무리하지 말라는 걱정스러운 말을 들으면서도 슬슬 눈치를 보며 마무리하였다. 걱정하는 자식들의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안의 내력에 대하여 별로 들은 게 없어 아쉬웠다. 할머니가 언제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는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호적상으로 있는 기록 외에는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산면 읍내리 산밑에서 농사 일을 하시며 젊은 시절을 사신 듯하다. 할아버지가 너무 술을 좋아하시어 매일 읍내에서 술을 드시고 자주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신 것 같다. 내가 출생했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는 55세의 나이에 일찍 별세하셨는데, 할머니는 나에게 "네 할아버지는 술로 살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나는 너의 할아버지 술 냄새가 싫으니 내 죽거들랑 산소를 쓸 때 분묘도 따로따로 담 둘러라"고 말씀하시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리 할머니 생전의 말씀대로― 아버지는 할머니의 산소를 그렇게 말씀대로 해드렸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분묘가 다른 데는 없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는 공공교육은 받지 않으시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 필력이 대단하셨다. 청운의 꿈을 품고 경성(서울)으로 올라가셔서 일본 생명보험회사 한국지사장까지 하신 것으로 들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 보험회사 직원들과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에서 태어나시고 서산으로 시집을 오셨다. 당시에 중매쟁이가 잘하여 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자손이 귀한 집에서 딸 둘 아들 셋을 낳으셨으니 대단한 일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의 친정은 부농의 집안이 아니어서 젊은 시절 꽤 많은 고생을 하고 사셨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20대 중반에 개신교 신자가 되시고, 무학인 듯한데도 언문은 다 깨치셔서 서울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막내아들인 내게 자주 편지를 주셨다. 교회에서는 속장도 하시고 권사로 교회 일을 많이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칭찬만 하셨다. 한 번도 내가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은 기억이 없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기 전까지 막내 아들인 나는 어머니, 할머니와 번갈아 가면서 한방에서 잠을 잤던 것을 기억한다. 할머니 어머니는 서로 막내인 나를 데리고 자고 싶어 하신 듯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정직하라’, ‘절약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자랐다. 어머니는 가세가 기울어진 어려운 형편에 돈을 만드시려고 돼지를 길러 파시곤 하셨다. 당시 돼지는 각 집에 구정물 통을 놓아주고 그 구정물 통의 음식찌꺼기를 양손에 바께쓰를 들고 수거하여 돼지 사료를 조달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50세 전후부터 그 일을 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6.25 전쟁 중에는 우리 3형제가 땔감 조달을 위하여 지게 지고 나무를 하러 산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산이라고 가야 나무가 있을 리 없어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오기도 하고 솔잎을 모아 오기도 하고 조그마한 소나무가 잘려 썩은 뿌리도 캐오기도 하였다. 나무를 해서 지게에 한 짐 지고 집에 와 나무를 내려놓은 후 배고파하니 어머니께서는 냉수에 아끼고 아낀 설탕을 풀어 주시기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식사를 하다가 밥알 한 톨이라도 남겨 버려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낭비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고 보고 배웠다.
우리 할머니는 개화기에 일찍이 기독교를 믿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를 며느리로 맞으시고 몇 년이 되어도 아기를 못 낳으니 2대 독자인 우리 아버지에게 아들이 생기기를 무척 바라셨다. 그러던 차에 서산에 서양 개신교(감리교) 선교사가 들어와 무엇이든지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매일 찬물 정화수를 떠 놓고, 소위 서양 귀신에게 비는 일을 정성껏 하셨는데 태기가 있어 어머니 나이 24세에 큰 누나를 낳으셨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 어머니가 예수를 믿는 개신교 신자가 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서산 감리교회에서는 가장 어른으로 존경을 받으신 듯하다. 해방 후 재정이 어려운 교회에 종이 하나 없어 산소통을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쳐서 종소리를 내게 했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우셔서 아버지를 졸라 서울에서 종을 제작하여 교회에 헌물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머니 역시 여신자의 신급으로는 가장 높은 권사로 일을 하셨다. 항상 찬송과 신약성경이 손에서 떠나질 않으셨다. 수시로 찬송하시고 성경 읽으시고 기도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매장해 드릴 때 할머니가 애용하시던 아주 구식 한글로 된 신약성경을 할머니 유언에 따라 관에 넣어 드렸다.
3. 내가 그간 소중하게 보관하여 오던 기록물들의 확실한 보존을 위해 노년에 들어와 국가기록원에 중요한 기록물을 기증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학교, 군, 직장, 교회 등으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증서류 등 내 삶의 중요한 흔적, 개인의 역사 자료라 할 수 있는 기록물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였다. 동 기록원에서는 보존 처리도 하고 자손들이 보고자 할 때 보여 주기도 하고 전시도 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기력도 떨어져 남은 생애 내가 보관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한 내가 세상 떠난 후 내 딸 사랑하는 은아나 경아가 챙겨 보관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물론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더 가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집안에서 보존하는 것이 좋을 듯도 싶으나 분실이나 훼손의 염려도 있고, 내 자식에게 부담을 지워 주는 일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라에서 보존 관리한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70여 년간 내 곁에 간직하던 걸 떠나보내면서 아쉬운 마음이 어찌 없었겠나.
4. 공익을 위한 일-양식 혼례식 바로하기 운동을 하였다.
나는 한국외환은행 지점장으로 처음 부임한 때가 1981년 9월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중요한 예금 고객의 동생 혼례식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주례를 맡아 주었던 이래, 어느 날은 하루에도 두 번이나 결혼 주례를 서는 등,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혼례식에서 주례를 맡아 왔다. 사실 지금도 가끔 주례를 서는데 그럴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혼례식을 진행한다. 처음에는 신랑 신부의 위치도 몰라 식장에 미리 도착하여 사진사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 나는 모든 예의 근본은 자리, 즉 위치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혼례에서 신랑 신부의 바른 위치는 기본이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례는 주례사나 하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옳고 바른 예식 진행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거나 문외한인 듯하다.
사실 나도 지난 35년여 동안 그래온 듯하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반성하는 뜻으로 수년 전에 '남좌여우 이야기'라는 글을 써서 친지들에게 e-mail로 돌리고 블로그에도 올려놓아 보았다. 많은 분이 관심이 있는 듯하여 수정 보완해서 4년 전인 2020년 가을 <유노상의 주례 이야기>를 책으로 제작 발간하고 시중 서점을 통하여 판매하였다. 반응이 좋았다는 느낌이다.
사실 내게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서 나라의 예산으로 2015년 12월에 만든 상세한 관제(官製) 회고록이 별도로 하나 더 있다. 『일평생 유노상 삶에 대한 녹화 구술-영상』 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보 형식의 회고록은 두 번째로 만들어지는 나의 사제(私製)회고록인 셈이다.
지금 맺음말을 쓰고 있는 본서-연보 형식의 회고록-를 포함한 6권은 순전히 내 자손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다만 「유노상의 주례 이야기」는 우리나라 양식혼례식 진행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려는 공익을 위한 것이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음을 첨언한다.
연보 형식의 내 기록을 정리하면서 나는 형용사를 가능한 한 적게 쓰려고 노력하였다. 형용사는 사실을 미화하는 데 흔히 이용된다. 남을 원망하는 표현을 기록으로 남겨 놓기가 싫어서 조심조심하였는데 그래도 그런 것이 있다면 내 본의는 아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내 자식들도 내 건강을 걱정하면서 도와주었다. 고마운 마음이다. 많은 친지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난 후 아내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아래에 열거하는 내용의 [나의 버킷리스트 7가지]를 완성한다. 내 아내 강명자 권사도 천국에서 기뻐하실 줄 믿는다.
생각하면 파란만장했던 내 생애의 긴 여정을 기록하며 어찌 아쉬움과 회한이 없을까마는 내 후손들이 이 회고록을 쓰는 나의 충정을 잘 이해하여 줄 것으로 믿고 여기서 쓰기를 마감하고자 한다.
1 『새로운 가계보(家系譜)』 편집 제작-2012.11.1.
2 『개인 기록물 정리-국가기록원에 기증』
『일평생 유노상의 삶에 대한 녹화 구술-영상 제작』-국가기록원
-2015.12.5.
3 『사랑의 가족 편지』-편집 제작-2018.9.24.
4 『유노상의 주례이야기』 출간 판매-2020.10..
-공익을 위하여-
5 『유노상 강명자 내외 기록물집』 편집 제작-2022.10.1.
6 『강명자 권사 성지순례 사진첩』 편집 제작-2023.5.23.
7 『유노상의 걸어온 길-연보형식의 자서전』 제작-2024.
2024년 가을
유노상
추기
이 연보에 쓰인 단어나 문장 중에는 오늘날의 한글 맞춤법이나 문법에 어긋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한문 사용이 우세했던 세대, 그리고 지금의 한글 맞춤법 문법 등이 정착되기 전의 세대 사람으로서 이러한 나의 진솔한 모습을 내 후손들에게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노상의 사사로운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8권만 제작되어 필자의 직계자손에게만 배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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