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전쟁의 혼란기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본다/ 정영일(경제학과 58학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24-05-07 16:50 조회1,056회 댓글1건본문
[분단과 전쟁의 혼란기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본다]
정 영 일
(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보통’학교에서 ‘심상소’학교, ‘국민’학교로
내가 모교 부산유락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이었으니 이미 69년전의 일이다. 지금은 3월이 신학년도이지만 당시는 미군정이 미국식 학제를 적용하여 9월부터 새 학년이 시작되었던 때였다.
당시의 우리 사회는 일제의 2차대전 패배에 따른 해방의 감격도 잠깐이었을뿐, 정치적 불확실성・경제적 궁핍・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던 그야말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체제 분단,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발발, 1953년 휴전에 따른 남북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진 해방정국의 와중에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오늘날의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1941년의 천황칙령에 따라 1943년부터 심상(尋常)소학교로부터 개칭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배경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국’자와 ‘민’자에서 따온 것이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의 Volksschule를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설명이다. 식민지시대 천황칙령을 같이 적용받았던 일본과 대만은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 잔재청산 차원에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폐기하고 소학(교)로 개칭한데 비해 우리는 해방 50년을 맞은 1995년에 와서야 뒤늦게 초등학교로 바뀐 경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근대 이후 우리나라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말 ‘서당’ 대신 생겨났던 ‘소학교’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뀐데 이어 1938년의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는 일본인 아동들의 초등교육기관인 ‘심상소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역사를 거쳐왔다. 이러한 제도개편 속에서 우리 모교도 1912년 개교 당시에는 동래공립보통학교 여자부로, 1925년에는 동래제2공립보통학교로, 1938년에는 동래제2공립심상소학교로, 1943년에는 부산유락공립국민학교로 개명을 거듭해온 것이다.
개교 당시 동래지역 유일의 공립보통학교내에 남・녀부가 따로 설치되었다가 1925년에 남학교는 제1보통학교로, 여학교는 제2보통학교로 분리되었으며 오늘날 각각 내성・낙민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동래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서는 부산제11심상소학교 (약칭‘11학교’)가 개설되었으며 이 학교는 오늘날 명륜초등학교의 전신에 해당한다.
의무교육・남녀공학의 시작과 6・25전쟁의 발발
우리나라 초등교육에서 의무교육과 남녀공학이 시작된 것은 1945년 미군정의 정책에 따른 것으로 모교의 경우도 1945년 9월에 입학한 26회부터 남녀구분 없이 학구에 따라 학교배정과 취학통지서를 받아 입학했던 것이다.
내가 입학했던 당시 유락국민학교의 학구는 수안동 일부, 낙민동, 연산동, 안락동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오늘날 동래지역은 산업화 이후 대도시로 바뀌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수안동과 낙민동은 복천동, 칠산동, 명륜동과 함께 동래읍 5동에 속했지만 연산동과 안락동은 근교 농촌지역에 속하고 있어 학생들의 구성도 농가와 비농가 자제들이 섞여있는 복합적 성격을 지녔다.
1946년 9월에 입학한 우리는 모교 재학중 해방정국의 혼란에 이어 1948년 8월의 대한민국 건국과 1950년 6・25전쟁 등 엄청난 역사적 진통을 겪으면서 1952년 4월에 졸업을 맞이하였다. 수학연한 6년의 초등학교를 5년 8개월만에 졸업하게 된 것은 미군정이 도입한 9월 신학년도로부터 이전의 4월 신학년도로 복귀하는 과정의 독특한 셈법 때문이다. 건국 이후 우리 정부는 5년에 걸쳐 매년 한 달씩 신학년도를 앞당겨 1953년부터 4월 입학이 이루어지도록 단계적 조정작업을 추진하면서 우리 학년의 졸업은 1952년 4월에, 다음 학년(모교 28회 해당)의 졸업은 1953년 3월에 각각 맞추어진 것이다. 민족사 최대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우리가 4학년을 마치는 마지막 달에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초등학교의 마지막 두 해 즉 5・6학년을 본교사는 군에 내주고 이곳 저곳 가교사를 전전하는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한반도 동남단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자란 덕분으로 직접 피난살이의 고초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모교에는 신병보충대였던 육군 제298부대가 주둔했고 지역주민들은 집집마다 밀려오는 피난민가족과 군인가족들을 맞아들여 온 식구가 방 한 칸에 모여 살던 기억이 선하다. 또한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부대배치를 기다리는 아들 면회를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시골할머니들로 동래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모교가 자리잡은 낙민동 지역의 변모
모교가 자리잡은 낙민동은 원래 동래읍성의 동남쪽 외곽으로 농가와 전통수공업공방들이 모여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동래역이 생기면서 몇몇 산업시설이 들어오고 비농가 주택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해방 직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때 모교 인근지역에서 그 위치와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동래역사(驛舍)뿐이다. 당시 목조단층 기와지붕 본관과 시멘트마감 목조이층 별관만으로 구성되었던 모교의 모습은 오늘날 대형 고층 콩크리트 건물로 개축되고 다양한 종류의 특수목적교실을 갖춘 현대식 교사로 우뚝 서있어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동해남부선 철도는 1925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철도12년계획⌟에 따라 석탄・목재・광물・해산물 등 자원을 반출하고 부산과 함경도(경원선 안변역)를 연결할 목적으로 추진된 동해선 건설의 일환으로 1930년에 착공하여 1935년에 부산진-울산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2차대전 패배와 국토의 남북분단으로 전체계획은 무산되고 오늘날까지도 부전-포항 구간의 동해남부선만이 운행되고 있다. 근년에 와서 부산광역시의 팽창에 따라 1990년에 수립된 ⌜부산도시철도기본계획⌟의 일환으로 1993년에 착공된 동해남부선의 복선전철화공사가 최근 마무리되어 전기기관차와 통근형 전동차의 운행이 아울러 가능한 도시철도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사업 과정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부산시내 전구간이 고가로 이설되고 수영-송정 구간이 장산을 관통하는 터널로 연결됨으로써 많은 역의 위치가 변경되는 가운데서도 동래역은 승강장이 고가(高架)로 바뀔 뿐 역사는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당시는 에너지원을 대부분 석탄에 의존하던 때여서 개솔린엔진을 이용한 자동차수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송기능의 대부분은 철도와 해운이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해남부선의 개통은 한반도 동남부지역의 화물 및 여객운송에서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당시 동래읍의 외곽에 해당했던 동래역 인근에는 정미소, 유리공장, 기와공장, 고무공장 등 제조업과 관련시설들이 입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교 정문에서 동래역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 쪽에는 산업조합의 대형창고들이, 왼 쪽에는 유리공장과 기와공장 등이 있었고 모교와 옛날 동래전차역 사이 뒷 길에는 고무공장이 있었으며, 동래역에서 오늘날의 부산도시철도 4호선 낙민역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 쪽에는 대규모의 정미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세화약품이 들어선 넓은 부지는 양곡과 비료 등 농업생산자재를 주로 보관하였던 산업조합의 대형 창고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원래 산업조합은 자본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경제적 약자의 입장에 놓이게 된 농민, 노동자, 소규모 자영업자 등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판매, 구매, 이용, 신용 등 사업을 영위함으로써 대자본의 지배에 대항하고자 한 방어적 조직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1913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설립된 고성면산업조합을 효시로 주민 자율의 산업조합이 임의조직의 형태로 각지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1926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산업조합령에 근거하여 당시의 금융조합이 담당했던 신용사업을 제외한 구매・판매・이용 등 세가지 사업을 담당하는 법적 근거를 지닌 산업조직이 보조금 지급과 제도금융 지원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식민지시대의 산업조합들은 쌀 등 농산물, 비료 등 농업자재, 곡물가공에 필요한 대규모의 농업창고를 보유하였으며 모교에 인접한 대형 창고시설은 동래역의 수송기능과 연계해서 입지한 것이다. 유리공장과 고무공장 및 기와공장도 대량의 원료 즉 규사와 고무원료 및 고령토 수송, 정미공장 또한 원료곡의 철도수송과 산업조합창고 보관・하역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모교 인근에는 남쪽으로는 철도 관사, 서쪽으로는 동래중학교(중・고등학교 분리 이전의) 관사 등 주로 일본인 직원・교사 등 전근이 빈번했던 공직자들을 위한 공공주거시설이 많았고 모교 구내에도 후문과 동래중학교 관사 사이에 교장 관사가 있었다. 모교 정문을 나서 왼쪽으로 칠산동과 복천동으로 향하는 도로의 왼 편에 몇몇 채의 주택이 있었을 뿐 오른 편으로는 농지가 동래고등학교앞 대로까지 이어져있어 가을이면 황금들녁에 메뚜기가 뛰어놀던 목가적 정경도 볼 수 있었다.
모교 후문의 높다란 돌계단을 내려가 여러 가닥의 긴 골목길로 이어지는 낙민동의 풍경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스텐레스제품이 나오기 전 놋수저, 놋그릇, 장죽 담뱃대 등 유기제품을 수작업으로 두드려서 만들던 수많은 ‘댓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망치소리다. 하나같이 나즈막한 초가의 어두컴컴한 나무창살 틈으로 보이는 유기제조 장인(匠人)들의 모습을 오늘날에는 접할 수가 없게되었지만 금속절단기나 연마기와 같이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 소음이 아닌 사람냄새가 풍기는 영롱하고 경쾌한 망치소리가 가내수공업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사교육 없던 학교생활
우리가 재학하던 시절의 한국 사회는 식민지시대의 경제순환구조가 붕괴되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구축되기 이전의 ‘결핍의 시대’여서 학교시설이나 운영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해방후 의무교육 시행에 따른 학생수 증가에도 교육시설 확충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교실난 때문에 저학년의 경우는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뉜 2부제 수업이 이루어졌으며, 정부 발행의 교과서만은 미국원조물자로 제공되었던 양질의 종이를 사용했지만 학과목 시험지조차도 ‘소똥지’로 불리웠던 저질의 재생지가 쓰였고 연필은 심의 흑연이 종이를 갉아먹을 만큼 조악한 ‘백두산연필’ 뿐이었다.
1층 건물의 본관과 2층 건물의 별관을 합쳐도 교장실과 교무실 등을 뺀 교실수는 12개를 넘지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한 학년 3개 학급으로 편성된 전체 학생을 수용하려면 저학년의 2부제 수업은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우리 학년은 입학 당시 남학생반, 여학생반 각 1학급과 혼성반 1학급 등 3학급이었다가 상급학년에 가서는 남・여 각 1학급씩 2개 학급으로 개편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유가 전시 학교운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5・6학년에 가서는 남・녀를 별개 학급으로 운영한다는 당시의 남녀공학운영지침에 따른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내가 속했던 1학년 1반은 취학연령인 6세보다 3~4세가 많은 급우들로부터 취학연령에 약간 미달하는 5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층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입학적령을 초과하는 신입생이 많았던 것은 주로 농가 자제들로 해방후 의무교육실시에 따라 뒤늦게 취학했거나 일본 등지로부터 귀국한 귀환동포 자제가 언어능력문제 등으로 1학년에 입학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학년때 줄곧 반장을 맡았으며 이미 고인이 된 김광춘(완수) 군의 경우 아침 등교 전에 소 꼴을 한 바지게 해놓고 올 정도로 성숙해 있었으며 귀환동포로서 급우 가운데 유일하게 6・25전쟁에 참전해 국가유공자가 된 이달용 군은 두어살 아래인 동생 학용 군과 같이 입학하기도 했던 것이다. 몇몇 장난꾸러기 급우들이 있었지만 연령과 체력의 현격한 차이로 학급내 위계질서가 자연스레 정립될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나의 1・2・3학년때 담임선생님은 각기 개성을 달리하는 한남선・박호연・김옥수 선생님 등 모두가 여선생님들이었고, 4・5・6학년때 남학생 반은 줄곧 젊은 남자선생님이셨던 허관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나의 기억으로 한남선 선생님은 아주 차분한 성격을, 박호연 선생님은 괄괄한 남성적인 성격을 지니셨던데 비해 김옥수 선생님은 젊고 매우 감성적인 성격의 미혼선생님이었다. 상급학년때 줄곧 우리를 맡아주셨던 허관 선생님은 처음에는 총각으로 맡 형님과 같은 친근한 리더십으로, 나중에는 신혼 가정을 꾸리시면서도 열정적인 진학지도를 아끼지 않으신 고마운 분이셨다.
당시는 사설학원은 물론 가정교사와 같은 초등학생 대상의 사교육이 거의 없던 때라 학교교육이 우리들 공부의 전부였으며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나 학습지도서도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학교를 파하면 숙제를 빼고는 집에서 공부하는 일이란 거의 없이 각종 놀이에 전념하는 행복한 초등학교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당시 모교의 교장으로는 나의 입학 당시부터 저학년때는 박진묵 선생님이, 졸업당시에는 김용우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은 원만한 성품을 지닌 원로교육자의 전형이셨으며 지역교육계에 몸담으셨던 선친과도 교분이 있었던 관계로 학령미달아동이었던 나의 입학을 허용해주시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다.
또 한 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은 해방 직후 모교 교가의 작사자이신 오경봉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님의 외가 손위 형제뻘되는 분으로 우리 가족과는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고 대단한 풍류문인이셔서 귀갓길에 약주가 약간 모자라실 때는 초저녁을 지난 시간에도 우리집 대문을 두드려 잠든 처남댁 식구들을 깨워놓기가 일쑤였던 분이셨다. 다재다능하셨던 선생님도 관리직에는 적성이 아니셔서 후에 동래군 바닷가 마을의 칠암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작곡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여기에 나의 기억과 동기회 총무 김성홍 군의 도움을 받아 당시의 교가 가사를 적어본다.
“태백산맥 뻗은 줄기 금정봉 되고
힘찬 파도 넘고 넘어 동해 푸르다
망월대 옆에 끼고 터를 잡아서
흰 구름 허리 속에 우뚝 솟은 집
이름도 즐거워라 우리 유락교
반만년의 단군 핏줄 고이 받아서
이 나라의 태극 앞에 맹세하였다
무궁화 향기퍼질 어린 꽃송이
굳세게 명랑하게 부지런하게
새 일꾼 길러내는 우리 유락교”
6・25 이전 본교사 시절의 기억
우리의 모교 시절은 1~4학년 기간의 본교사 생활과 5・6학년때의 가교사 생활로 절연히 구분된다. 해방 직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6・25가 발발하기 전에는 나름대로 평탄한 학교생활이었다. 당시의 교과목은 국어・산수・사회・과학・음악・미술・체육 등 7개 정도로 편성되었으며 (성적)통지표에는 각과목 10점 만점으로 과목별 가중치 없이 단순평균한 성적과 학급내 석차가 기재되어있었다. 나에게 언제나 ‘아킬레스의 건’이 되었던 과목은 미술이었으며 국어・사회・음악은 가장 쉬운 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미술과목도 특별교실이나 전담교사가 없이 담임선생님 한 분이 맡으셨고 풍금(오르간)솜씨가 없으신 선생님들은 육성으로 동요 부르기를 지도해 주셨다. 체육시간은 맨손체조(국민보건체조)를 빼고는 달리기나 공놀이를 하는 것이 주된 수업내용이었다.
기억에 남은 학교행사로는 봄・가을의 소풍, 가을 운동회, 대체로 봄 철에 열렸던 학예회 등이 있다. 당시의 소풍코스는 어린이들이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편도 2~3킬로의 근거리에 국한될 수 밖에 없어 단골 목적지는 온천장 금강(공)원이었으며 간혹 양정동에 있는 우리 집안 동래 정씨의 정묘(鄭墓)를 다녀오기도 했다.
금강원은 예나 지금이나 부산의 벚꽃놀이 명소였으며 거의 유일한 시내교통수단이었던 전차 종점이어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곤 했다. 소풍 때는 모든 학생들이 주로 김밥 등 도시락과 과일, 과자, 사이다 등 간식을 각자 집에서 준비해왔고 1~2학년의 경우 할머니나 어머니와 함께 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대의 수학여행은 졸업을 앞둔 6학년때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그리 멀지않은 경주 등지를 기차로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우리 학년의 경우는 6・25전쟁중이어서 수학여행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로 10월에 열렸던 가을운동회는 많은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최대의 교내행사였다. 전학년 학생들이 오전・오후에 걸쳐 다양한 종목에 참가하는 형식이어서 개인별 참가기회는 기껏 2~3회에 그쳤고 대부분의 시간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응원전에 할당되었다. 해방 전의 홍군・청군 대항전이 남북분단 후 반공이념의 강화로 청군 대 백군으로 바뀐 사정은 지금도 그대로여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않다.
당시의 대가족제도 아래서 가을운동회에는 할아버지・할머니부터 꼬마동생까지 온 가족이 총동원되고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 뿐 아니라 감・밤・고구마・떡 등 계절의 자연식품이 풍성했던 지역공동체 최대의 행사였으며 간혹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와 손을 잡고 달리기에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져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운동회의 개인필수종목은 100미터 달리기로 1・2・3등까지 공책・연필 등 상품이 주어졌지만 나의 달리기 실력은 8명 중 4~5위권 정도여서 입상했던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속에 모래를 넣고 천으로 싼 애기주먹만한 크기의 공기를 던져올려 높다랗게 매달린 지름이 1미터를 넘은 두 개의 커다란 종이공을 터뜨려 속에 든 비둘기들을 날려보내는 단체경기로 종이공이 터지면 모두들 환호성을 올렸으며 이 경기의 배점이 청・백군의 성적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을운동회와 대조적으로 대체로 봄철에는 학예회가 열렸다. 당시는 물자가 부족하던 시대여서 학예회에 쓰였던 소도구들은 대부분 종이를 잘라 색칠한 정도였으며 출연자의 복장도 소박한 검정 양복이나 흰 브라우스였다. 학예회 장소는 교내에서 열린 경우는 별관 2층 교실 세 칸의 간막이를 떼낸 공간을 활용했으며 비교적 대규모로 열렸던 한 차례는 당시의 동래전차역앞 옛 동래극장에서 열렸던 기억이 난다. 학예회의 프로그램은 음악과 연극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당시는 음악 사교육을 통해 기악이나 성악을 따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독창과 합창이 대부분이었다. 연극프로그램으로서는 당시의 시대적 관심을 반영하여 한국문제를 토의하는 모의유엔총회를 소재로 삼은 적이 있었고 나도 중립국 인도 대표의 역할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모교 풍경에서 특이했던 점으로는 비오는 날 교정에 한지에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과 광목천으로 된 양산 이외에 농가의 전통 우비인 삿갓・‘도롱이’(짚으로 만든 판초우의)가 등장했으며 도시락도 알루미늄제품과 함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초백이’가 나란히 쓰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교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결핍의 시대’ 어린이들의 놀이는 비용이 드는 특별한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신체운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남학생들은 여름철에는 농사용 웅덩이나 개울에서 개헤엄치기, 미꾸라지・붕어 등 물고기잡기, 잠자리잡기 등으로, 겨울철에는 팽이돌리기, 썰매타기, 연날리기, 못치기, 자치기 등으로 소일하였으며, 4계절을 불문하고 날마다 골목마다 공차기, 병정놀이 등이 성행했다. 여학생들에게는 공기놀이, ‘씨차기’(납작한 조약돌을 발로 차서 그어놓은 선 안에 넣는 놀이), 고무줄놀이, 줄넘기 등이 가장 일상적인 놀이로 되어있었으며 고무줄놀이때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는 노랫말을 곁들인 ‘동요’가 불리웠던 기억이 난다. “부산에 김00야 돈많다고 괄시말라 사람팔자 시간문제다” “김씨 간다 간다 우리 오빠는 전쟁에 나가서 이겨주세요 하나 둘 셋 넷 이겨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기다리신다.” 생사가 걸린 전시의 극한상황에서 부자와 병역기피자에 대한 서민들의 저항의식을 반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 가교사 생활의 추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된지 불과 며칠 지난 어느날 모교 교정에는 피난민을 가득 태운 군용트럭들이 진입해왔고 그날부터 본교사를 군에 징발당한 우리는 얼마간의 임시 휴업 끝에 2년 동안에 무려 10여 곳의 가교사를 전전하는 전시학교생활을 겪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의 최초의 가교사는 철도무선중계소가 있었던 동래역옆 ‘무선산’ 중턱에 가마니와 풀잎으로 지붕을 덮어 비오는 날이면 빗물이 줄줄 새는 참으로 열악한 움막이었다. 이후 우리의 배움터는 모교 정문 건너편 유리공장 구내, 동래소방서 2층 마루방, 전차길 건너 삼성대에 있던 크레욘공장, 명륜동 소재 동래향교 누각, 지금은 충렬사 경내에 흡수된 안락서원 대청마루, 수안동 우체국옆 탁구장 등으로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한 끝에 우리 담임이셨던 허관 선생님 자택에 가까웠던 안락동 호선마을회관에 정착했었던 것 같다. 전쟁 통에 교실임대차 계약이나 임차료 지급이 제대로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용공간이 발견되면 시설을 내주는 측의 호의에 힘입어 우선 얼마동안이라도 무료로 사용하는 조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교사 시절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피난학생들의 끊임없는 전입에 따른 ‘콩나물시루 교실’이다. 6・25 직후에는 매일같이 이어진 피난학생들의 편입으로 가장 많았을 때 우리 학급의 학생수는 90명을 넘어 100명에 육박했던 것 같다. 아마 1951년초의 일로 기억되는데 동래에도 전시연합(피난)국민학교가 생겨 초과밀학급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 졸업때까지 우리 반 학생수는 여전히 70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좁은 교실 안이 책상으로 가득차 칠판 바로 아래부터 맨뒤쪽까지 걸어다닐 틈이 없을 정도여서 학생들이 책상 위를 걷거나 뛰어다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교실에는 조명도 없어 비오는 날에는 칠판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담임교사 인솔 아래 우리 학급 전원이 장산 중턱까지 교실 난로에 쓸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원정을 갔다가 단속원(산림계)의 눈을 피해 나무는 하는 둥 마는 둥 내려오기에 바빴던 일이다. 당시는 우리가 6학년 때여서 중학교 입학 국가고사 준비 등으로 저녁시간까지 학교공부를 해야했지만 예산부족 때문에 비상수단을 동원해 난방연료를 스스로 조달해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 동래역과의 또 하나의 인연은 전방출정 국군 환송행사였다. 그때 당시 모교와 내성국민학교에 육군보충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동래역은 제주도 훈련을 마친 신병들의 전방송출 거점으로 되어있어 지역의 각급학교 학생들은 출정장병 환송행사에서 열심히 태극기를 흔들며 그 분들의 무운을 비는 것이 일상사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졸업식은 동래지역 유일의 강당 역할을 담당했던 구 동래극장에서 열려 재학생대표 송사, 졸업생대표 답사, 교장선생님의 격려사, 학부모대표 등 하객들의 축사 등 정해진 순서에 뒤이어 학생 일동의 졸업가로 마무리되었다. 식장에서는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일부 졸업생들이 소리내어 울기도 했지만 대부분 졸업생들은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기억과 옛날 일을 꿰뚫고있는 송봉명 군의 도움을 받아 그때 졸업가의 가사를 여기에 적어본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동문들의 건승과 ‘새로운 100년’ 모교의 웅비를 염원하면서
우리가 모교를 졸업한 한국전쟁기 이후 무려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대부분의 급우들은 올해 희수(喜壽)를 맞이하고 있으며 열명 중 서너명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 고인이 되었다.현재 생존해 있는 급우들 가운데 약 2/3는 동래지역에, 나머지 1/3은 서울 등 수도권에 살고 있다. 동래지역의 친구들은 유락초등학교 27기 동기회(회장 남교석 총무 김성홍) 조직을 아직도 가동하고 있어 매달 월례회에 10여명이 꾸준히 참여하여 어린 시절의 우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그 중 7인의 멤버로 구성된 고우회(회장 이상갑 총무 김성홍) 활동이다. 두 모임의 붙박이 총무로 봉사하는 교직 출신 김성홍 군의 설명에 따르면 ‘고우회’는 고스톱동우회의 약자로 한 달에 여섯 차례 27회 기수와도 우연히 일치하는 2일・7일 동래장날이면 동래시장안 기장아줌마네 좌판식당의 푸짐한 점심행사에 뒤이어 친목게임이 벌어진다고 한다. 멤버들이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한 10여년 전부터 같은 시간・장소에서 지속되어온 고우회모임이야말로 오늘날의 삭막한 세태에서 연면히 이어지는 훈훈한 전통문화행사라고 할 법하다.
인근 다른 학교들과는 달리 남・녀 동창들이 함께 모이는 기회는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직간접으로 소식을 접하는 여학생 동창으로는 영문학을 전공한 부경대의 김보희 명예교수, 동래여고 교장을 역임한 오정필 선생, 지역 약업계에서 성공한 윤정자 약사 등을 들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로는 양돈연수원장을 지낸 조동주 군, 요업분야에서 대성했던 이기영 군, 중견기업 CEO를 지낸 송봉명 군, 제약산업에서 활동했던 허원 군, 공직을 거쳐 세무회계 분야에 종사한 노월영 군 등이 정기모임은 없지만 고등학교 동기모임 등을 매개로 간헐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처음에는 간단한 회고담으로 끝낼 심산이었지만 착수하면서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당시의 시대상황과 학제변동, 변화무쌍했던 학교생활, 모교 인근지역의 변모 등에 관한 기술을 통해 지난 시대에 대한 후배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 탓으로 너무 장황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두서없는 이 글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모교의 역사 가운데 현대사의 격동기에 해당하는 해방 직후의 한 시대를 돌아보는데 다소나마 참고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100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모교의 밝고 힘찬 앞날에 영광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염원한다. <끝>
----------------------
*이 글은 부산유락국민학교를 졸업한 필자가 모교 국민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문집(2015년 발간)에 기고한 글을 전재한 것 입니다.
유노상(경제학과 58학번)
댓글목록
님의 댓글
작성일
정영일 교수님의 14년전 부산유락국민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문집에 실린 역작은 매우 흥미롭고 뛰어난 기억력 또한 놀라울 지경입니다. 나의 지나간 서울과 부산에서의 교육과정을 다시금 되 돌아 볼 좋은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58회 이선호 숙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