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Bucket List(1) / 鷺鄕 백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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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4-01-05 16:14 조회1,451회 댓글0건본문
나의 Bucket List(1)
鷺鄕 백기덕
내 나이 토끼띠 84세 이제 8십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나이는 내가 국민학교 입학할 때 아버님과 형님이 만든 가호적(假戶籍)에 따른 것으로 이름도 지금 이름이 아닌 기순이었다. 국민학교 친구들은 지금도 그 이름만 알고 있다. 이북에서 내려와 호적이 없을 당시 아버님과 형님이 숙덕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늦둥이 막내인 나를 낳으신 아버님께서 82세에 귀천(歸天)하셨으니 나도 이제 언제 가더라도 불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세월도 나이 따라 간다 하니 이제 단속 경찰도 어찌해 볼 수도 없는 85마일 과속으로 종점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마음은 아직 삼십 대인데 오늘 아침에도 경로석에 앉았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기에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하고 고맙기는 해도 언제 벌써 이렇게 늙었나 하고 마음은 언짢더라. 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도대체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된 것이리라.
한때 유행했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에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하는 노래도 있지만 이는
욕심일 뿐이고 이제 내 나이가 언제 아버님 어머님이 계신
하늘로 돌아갈 날이 될지 모르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 그런지 50여 년 전 역촌동에 살 때 옆집에 살던 인표 아빠가 생각났다. 인표라 부르는 대여섯 살쯤 먹은 꼬마 아이를 가진 젊은 부부가 살다 이사를 갔는데 어느 날 그 아빠가 살던 집을 휘 돌아보고 가더니만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병으로 아프다는 말은 진즉에 들었지만 서도 그리 쉬 갈 줄을 몰라 가슴이 아픈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은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며 그래 나도 죽기 전에 미국에 다시 한번 가봤으면 하던 차에 딸들 덕에 미국엘 다시 가게 된 것이다.
내가 미국에 처음 간 것은 가을도 저물어 가는 1976년 늦가을 입행 동기들에 비해 늦은 해외지점 발령에 “고목(古木)나무에도 꽃이 피었네”하며 너스레를 떨고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짜리 연년생 두 딸과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뉴욕에 간 게 어제 같은 데 이제 50줄에 들어선 딸들이 이 아비가 죽기 전 소원(Bucket List)을 이루도록 초청한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을 Bucket List(소원목록 所願目錄)라고 한다는데 이 말은 ‘킥 더 버킷 (kick the bucket)’에서 나온 말로 중세시대 교수형을 집행할 때 사형수(死刑囚)가 올라간 양동이를 발로 걷어찬다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하며 이 버킷 리스트가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은 2007년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 ‘버킷 리스트’가 상영된 후부터라 하는바 나도 이 영화를 보고 버킷 리스트란 말도 처음 알았고 장엄한 광경의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생생한 것이 다 인연인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시한부 인생(時限附人生)으로 죽음을 앞둔 두 주인공이 한 병실을 쓰게 되면서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고 병실을 뛰쳐나가 이를 하나씩 실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카이다이빙 하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오토바이로 만리장성 질주하기. 에집트의 피라미드와 인도의 타지마할 보기. 최고 미녀와 키스하기. 장엄한 광경 보기 등 삶에 쫓겨 못해본 열 가지 목록을 하나하나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로 앞으로 얼마나 살지 알면 훨씬 더 자유로울 거라는 설명도 덧 붙쳐진다.
그들이 작성한 10가지 소원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들은 그 목록에 줄을 긋고 이를 통해 외로운 백만장자는 가족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가난한 정비사는 인생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두 노인은 각자의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두 사람을 태운 재를 담은 커피 캔이 히말라야 전경이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에 봉안되면서 두 사람의 마지막 소원인 장엄한 광경 보기가 완성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살아서 이루지 못한 마지막 소원 '장엄한 광경 보기'에 줄이 그어진다. 결국 그들은 죽어서 소원을 이루게 된다.
아! 그래 나도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향해 떠나보자. 드디어 출국 날 이른 아침 딸내미가 마련해준 미국행 비행기표를 들고 짐도 부치고 좌석도 미리 정할 겸 하여 Kal카운터엘 찾아갔다. 카운터 아가씨가 미국 입국 검사 때 필요한 코로나 예방접종증명서(Coove)가 있는지 검사해보자며 휴대폰을 달라기에 휴대폰을 건네주니 한참을 손으로 조몰락거리더니 이제 됐습니다 하며 돌려주더라.
그런데 비행기 짐을 부치고 돌아 나와 친구들에 나 이제 떠나네 하고 전화하려 하니 아뿔사! 전화기가 먹통이 되어 켜지질 않는다. 놀라 전화를 다시 켜보니 PIN 번호 6자리를 넣으시오 하는 처음 보는 낯선 문자가 뜨기에 어? 이게 뭐지? 하며 평소 사용하는 암호 숫자도 넣어보고 내 생년월일도 넣어보고 몇 차례 기억나는 숫자를 넣어봤지만 계속 불통이어서 급히 Kal카운터에 다시 찾아가 어찌 된 일이냐 물어도 자기도 모른다는 답만 돌아오더라. 급한 마음에 삼성 디지털 쎈타를 찾아가 긴급도움을 요청하니 사용할 수 있도록 고칠 수는 있지만 저장된 모든 자료는 영구 소멸되며 복구 불능하다는 대답이어서 청천 하늘에 이런 날벼락이 웬 말이냐 하며 그렇다고 과거를 다 지을 수도 없고 해서 아무 쓸모도 없는 쇠뭉치를 안고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옥에도 티가 있고 좋은 일에는 탈도 많으며 좋은 일에 풍파가 일어날 것을 누가 알겠는가
(美中不足 好事多魔誰知好事多磨起風波)라고 읇조린 중국 원나라 남희(南戱)의 비파기(琵琶記)에 나오는 호사다마
(好事多魔)란 옛말이 바로 이를 두고 말 함이노라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동기들 연락처와 사회 생할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 전화번호, 문학모임을 비롯 각종 모임과 메모장 등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건 자식들 전화번호도 아니고 부잣집 맏아들과의 혼사도 마다하고 삼팔따라지 날 따라와 지지리도 복도 없다며 아이고 속 터져 하며 궁시렁거리는 내 인생의 반쪽인 할망구 전화번호만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행기를 타고서도 코로나 예방접종 증명도 보여 줄 수 없게 되었으니 입국도 못 하면 어쩌나 하고 안절부절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정작 케네디공항에서는 휴대폰을 보자고도 안 하고 여권에 입국 도장을‘쾅’하고 찍어주어 역시 형제 나라여 하며 무사히 딸내미 집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입국 바로 다음 날 전후 사정을 알게 된 딸내미가 사준 새 휴대폰을 받고 오 그래! 여기가 신천지 미국 땅이렸다 하며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 모두를 까먹고 신천지에서 새롭게 살아보라는 하늘의 뜻이련가 하여 카운터 아가씨에 울면서 겨자 먹듯 들리지도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아가씨 새로 살게 해 줘 고마워!”하기도 하였다.
미국 사는 두 딸은 내가 두 번에 걸쳐 10여 년 가까이 뉴욕에서 근무하다 보니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미국에서 공부 국내학교 졸업장이 없어 큰딸은 미국 수도 워싱톤 백악관 근처에 있는 세계적 유명 보석상에서 일하고 작은딸은 저지 버스킹 릿지에서 중학교 선생으로 일하며 산다. 내 일찍이 미국 묘지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미국 땅에 묻혔으면 였는데 딸들이 내 소원을 대신 풀어 준 격이 되었다. 오죽하면 그때 만세 부르고 포트 리(Fort Lee) 백씨의 시조(始祖)가 되려고도 했을까!
작은딸이 사는 버스킹 릿지란 동네가 내가 처음 미국에 와 살던 포트 리와 가까워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하더라.
나의 Bucket List의 첫 목록이 초등생 두 딸이 손잡고 아장아장 학교 가던 골목길에 가보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파트 뒷길 따라 학교 가는 그 골목길 여전하더라. 아담한 2층 주택들 사이로 난 골목길이 그리 정다울 수가 없더라. 낯익은 작은 소방서도 반갑고 골목길 모퉁이 도서관도 정답더라. 50여 년의 세월이 멈춘 듯 그래 나만 늙었네 하고 그 골목길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미국 참 부러운 나라다. 땅이 넓어서도 아니오 햄버거가 맛있어서도 아니다. 미국은 어느 마을이나 그 마을 출신으로 전쟁에 나가 전사한 용사들을 꼭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기념탑이나 용사 사진을 넣은 깃발을 메인 스트리트에서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주 거닐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거리 포트 리 메인 스트리트에도 We will never forget (그대들을 잊지 않겠습니다)고 쓴 벽면에 이름도 모르던 나라 한국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용사들의 사진이 진열된 참전용사기념관(Old Veterans Memorial)이 있다. 오늘 다시 찾아가 6.25 전쟁 춥고 배 고팟던 피난 시절“쪼코렛 기브 미”하고 미군 차를 뒤쫓던 꼬마였던 내가 이제 팔십 노객이 되어 여기 왔습니다 하고 고마운 마음에 묵념을 올리기도 하였다.
포트 리엔 우리가 살 때 만해도 한국 사람 보기가 쉽지 않을 때 여서 한국 사람이 운영하던 식품점 장스 마켓이 유일한 위안거리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거리마다 한국 가게가 즐비하여 한국촌이 되었더라. 떡집 반찬가게 책방 미용실 심지어 명동 칼국수와 북창동 순두부도 먹을 수도 있게 변했더라. 한국 빵 가게 파리 바켓과 커피숍 카페베네에 한국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하는 모습이 여기가 명동인가 할 정도가 되었더라.
노병(老兵)들이 다시 모였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데 사라지지도 못한 노병 넷이 선술집에 모였다. 한 친구는 뉴저지 저 남쪽 아틀란틱씨티에서 두 시간이나 차를 몰고 달려왔고 한 친구는 점포를 3개를 운영하며 미 대륙을 두 번이나 횡단하였다며 밥값 전담의 알부자 친구 또 한 친구는 나와 같은 은행에 근무도 하고 먼 이국땅에서 한동네에서 살기도 하였는데 바람 따라 저 멀리 남쪽 텍사스까지 내려가 살더니 여우가 죽을 때가 되면 제가 살던 굴 있는 언덕으로 머리를 돌린다(狐死首丘)고 얼마 전 포트 리로 돌아와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6~7십 년대 한국 경제발전의 첨병으로 상사 주재원 또는 금융기관원으로 미국에 와 한때 이십여 명이 넘는 친구들이 북적거리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목메어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제 다 떠나가 대답 없는 형제가 되었고 우리 넷만이 남았구려 하며 세월의 무상함에 막걸리 술잔을 들고 울고 웃기도 하였다
오늘 우리의 이 만남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만남이겠지 하며 헤어지는데 한 친구 저 건너 보이는 교회당이 30년 후 내 장례미사를 치를 곳이야 하기에 그럼 나 30년 후에 또 와야겠네 하며 쓸쓸히 웃었다. 그래 우리 30년 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세!
영원할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다 결국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앞에 두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하며 85번 국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멀리서 우뚝 보이던 내가 살던 20층 고층 아파트가 웅장한 히말리아 산처럼 보이면서 그럼 나의 버킷 리스트도 여기서 끝나는가? 아니야 가야 할 곳이 더 있어 하며 첫 소원 목록인 포트 리에의 귀향을 끝내고 다음 소원 목록을 찾아 나의 버킷 리스트는 계속 되더라.
<다음에 계속>
필자:백기덕
서울상대 졸업(58학번)
한국외환은행 40년근무
매일저축은행장 역임
위 글은
계간 <글의 세계>2023년 겨울호에서 전재함
柳魯相
카톡에 오고간 글을 전재함
----한국문단의 수필가 임건혁 선생의 촌평---
鷺鄕 백기덕 老 선배님의 [나의 Bucket List] 를 읽고 또 읽어 봅니다.
마음이 따뜻해져 옵니다. 고향의 옛집 안방 화롯불 같습니다. 그 화롯불 옆의 할아버지 조근조근 이야기 같습니다. 순하고 평이로움이 현학적 기어(綺語) 를 물리쳐 멀리 귀양 보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相由心生 ㅡ외모는 마음의 모양을 따른다는 ㅡ이라는 옛말이 정말이라 생각됩니다. 鷺鄕 선배님의 마음 밭이 따뜻, 푸근하니 선배님의 존안이 그렇게 따뜻· 푸근한 것이겠지요.
또 한편, 선배님의 글은 이따금 배시시 웃게도 만듭니다. 그런데 그 웃음 밑에는 연기처럼 애잔한 느낌이 배어 있습니다. 그 애잔함은 ㅡ 이북땅 어디쯤 백로가 날아들던 고향을 못 잊어 가슴 속에 서린 한이 웅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鷺鄕 선배님,
몸속에서라도 남북통일을 이루라고 백두산 생수와 한라산 생수를 마셨다더니 이제 미국 생수를 섞어 마시고 고향 그리움의 농도가 좀 엷어 지셨지요?
아무쪼록, 30년 후 말고, 그 안에 미국 고향 포트리(Fort Lee) 에 자주 다녀오시지요.
ㅡ건강 잘 살피시라는 아부 말씀 이 말 밑에 숨겼습니다.
임건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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