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영전에 합장(合掌)하는 어느 일본인 " 권태명(경제학과 58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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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3-10-22 22:27 조회1,254회 댓글0건본문
"안중근의사 영전에 합장(合掌)하는 어느 일본인"
권태명(경제학과 58학번)
"그간 보여 준 친절, 마음 속 깊이 고맙게 생각하오. 동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우호관계가 회복될 때 다시 태어나 반가이 만나기로 하세." "선생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죄송한 마음 가슴이 저립니다. 앞으로 선한 일본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이 짧은 대화는 옥문을 나와 형장으로 향하던 안중근의사와 5개월간 그를 감시한 일본헌병 간수(看守)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가 주고받은 마지막 인사말이다.안중근 30세, 치바 25세 때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두. 일본의 원훈(元勳)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열차안 회담을 마친 후 러시아군의장대를 사열하고 마중나온 하얼빈주재 일본교민들이 기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때 러시아군 뒤에서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이가 침착하게 앞으로 걸어나와 4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이토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세번 울린 금속성이 멎는 순간 이토의 몸은 그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세발 모두 급소에 명중됐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지난 후 청년은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번 외쳤다. 그는 한국독립의병군참모중장 안중근이었다. 30분 뒤 이토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체 눈을 감고 말았다.
하얼빈역
이토 저격 소식을 보고받은 만주주둔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즉각 여순시에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음 날 헌병대를 하얼빈역으로 파견했다. 상등병 치바 도시치도 이 헌병파견대의 일원으로 선발됐다. 안중근은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진행된 조사에서 동양평화의 교란을 비롯하여 민비살해와 한국군대 해산 등 이토가 저지른 15개조항의 죄상을 상세하게 고발했다. 한 주간동안 이어진 검찰조사가 끝나자 헌병대는 11월3일 안중근을 여순감옥으로 호송했다. 치바 도시치의 인생을 바꾼 안중근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날부터 치바 도시치에게 안중근을 감시하는 간수임무가 떨어진것이다. 두사람의 합숙은 안중근의사가 사형되기 까지 5개월간 계속됐다.
현대일본의 설계자로 일본국민들로 부터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에 대해 치바 도시치가 증오심을 가졌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일본검찰의 조사가 시작된 11월14일부터 저격 동기의 진실이 알려지면서 치바의 심경은 서서히 바뀌어 갔다. 수감자로서 일상 기거 동작에 예의와 품위가 반듯 하고 검찰조사에서도 이토의 살해동기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라 과거 20여 년간 조선조정을 위협하여 불법적으로 내정을 전횡한 인물이 바로 이토라는 사실을 준엄하게 규탄하고 권력 앞에서도 흩으러지지 않은 의연한 자세를 눈여겨 본 치바는 그러한 안중근에게 마음이 끌리기시작했다. 특히 안중근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론과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그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이 치바의 생각을 크게 흔들었다. 날이 거듭되면서 안중근에 대한 존경심은 신앙의 수준으로까지 바뀌어갔다.
위국헌신군인본분
사형판결에 대해 안중근은 공소하지 않았다. 공소포기 이유에 대해‘わが心の安重根(내마음 속의 안중근)’을 쓴 사이토 야스히코(齊藤泰彦)다이린지(大林寺)주지는 아들의 사형소식을 전해 들은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아래와 같은 충고를 전하고있다. "행여 네가 늙은 어미 보다 먼저 가는것을 불효라고 생각하지마라. 너의 죽음은 너 하나의 문제를 넘어 한국국민 모두가 품고있는 공분을 짊어진것이다. 공소를 제기하면 그건 네가 구차하게 명을 구걸하는것과 진배없다. 어미는 네가 깨끗한 죽음을 택하길 원한다."
여순감옥에는 치바 도시치 외에도 안중근을 존경한 일본인이 더 있다. 당시 전옥(典獄,형무소장)인 구리하라 사타기치(栗原貞吉)는 언제나 안의사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 함은 물론 법원장과 재판장을 번갈아 찾아다니며 안중근의 구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흰 옷을 만들어 넣어주고 특급 재질의 목제관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다 사형이 집행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바로 전옥직을 사임하고 고향 히로시마로 돌아가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다. 또한 안중근의 국선 변호사인 미즈노 기치다로(水野吉太郞)는 안의사를 명치유신 당시의 일본지사(志士)에 비유하며 성의껏 변론했다. 변호를 맡고 부터 안중근을 존경하게된 그는 안중근의 사형선고를 막지못하자 그 뒤부터 사형수의 변호는 한번도 맡지않았다. 미즈노 변호사는 안중근의 전도로 천주교에 귀의 했다.
사이토 야스히코 주지는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서 그렇지 일본에는 안중근을 숭모하는 사람이 이외로 많은 사실을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1982년에 열린‘안의사와 치바 도시치를 위한 공양행사’때 참석한 이토 저격사건 당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이토를 수행했던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남만주철도 이사와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祿)전 일본게이단렌(日本經團聯)부회장이 가졌던 대화를 소개하고있다.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세계 명사들 중에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안도씨의 물음에 다나카씨는 주저없이 "좀 분 하기는 하지만 단연 안중근 이오"라고 했다. "당신은 이토와 같은 고향인 조슈(長州, 현 야마구치현)출신 이잖아요?"라는 안도씨의 물음에, 다나카씨는 "인간의 속 마음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알기 어렵다지만 때로는 단 한번의 짧은 조우에서 도 그 위대함을 파악할 수 있다고 봐요. 내가 안중근을 본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 이었지만 이토를 보는 그의 눈매가 정말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나도 부상을 입었지만 아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그를 보는 순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하고 시원함이 느껴졌어요. 현장에 있었던 불과 2분 정도의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생전 처음본 안중근이란 인물에 완전히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안도 도요로쿠는 이어 "안중근이 처형될 때 나는 13세 소년 이었지만 하얼빈사건 보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차츰 공부를 해가며 안중근의 이토 저격을 암살 또는 테러라고 하는 주장이 합당한 표현 인가에 대해 회의가 들기시작했다. 백주에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도 평온하고 평정한 모습으로 이토를 저격하여 세발을 모두 명중시킨 이런 ‘암살의 역사‘ 는 세계적으로 예가 없다. 암살이나 테러라는 말은 당시 현장의 상황과 전혀 맞지않는다. 메이지유신 초기부터 조선수탈을 내정과 외교의 주요목적으로 내세운 일본으로부터 핍박당한 한민족이 안중근 이란 한인간을 통해 생존을 위한 선택을 절체절명의 장소에서 표출한 것으로 밖에 볼수없다."고 안중근의 의거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행동으로 규정했다.
198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순국 80주년을 맞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검증하기 위한 한중일 3국의 역사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국제심포지엄이 하얼빈에서 열렸다. 이날 일본의 안중근연구자인 나카노 야스오(中野泰雄)일본아시아대학교수는 "하얼빈 현장에 와서 당시를 되돌아보니 안중근이 구축한 동양평화론의 입장을 알것같다. 남의 나라 영토를 한 뼘이라도 침범하는 행위는 온당치 않다고 주장한 안중근의 생각은 옳았다. 그의 주장은 한중일 3국에 있어 지금도 변함 없는 입장이다" 라고 밝혔다.
1990년 7월 어느날 가진 사이토 야스히코 다이린지 주지와 야마모토 소이치로(山本壯一郞) 전 미야기현주지사가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화가 사이토의 저서인 ‘내 마음 속의 안중근’에 실려있다. 야마모토씨가 "지사시절 다이린지에 세울 안중근의사와 치바의 관계를 기리는 기념비 건립 때 비지(碑誌)에 ‘한일양국간의 영원한 우호를 기념해서’라고 써준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얼마전 외무성이 당시를 회상하는 글을 외교포럼 잡지에 기고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고 밝히자 이 말을 들은 사이토주지가 "돌이켜 보면 10년전엔 생각조차 할 수없었던 일이네요"라고 응했다.
야마모토씨는 "세상이 변한거지요. 솔직히 말해 당시 그 글을 쓸때 나는 사실 신경이쓰였습니다. 한국 에서야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당연히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겠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명치 원훈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죄로 사형 당했잖아요. 내가 신경이 쓰인 것도 바로 그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순감옥에서 안의사의 간수인 이 지방 출신 치바와의 은수(恩讐)관계를 넘어서 인간애로 이루어진 멋진 우정을 알고부터 그동안 가졌던 염려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치바도 보통 사람이 아니지만 치바로 하여금 평생토록 영전에 합장토록 한 안중근의 삶의 자세야 말로 정말 당당하고 훌륭했습니다"라고 했다. 외교포럼지는 그 해 10월호에 "獄中に生まれた日韓友好の絆, 悲運の獨立運動家安重根と看守千葉十七の友情秘話(옥중에서 태어난 한일우호의 유대, 비운의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간수 치바 도시치의 우정비화)" 라는 제목을 달아 다나카씨의 기고문을 발표했다.
안중근의 의거를 이해하고 지지한 몇 몇 일본인의 예를 소개했지만 인간의 생명과 국가영토 보전의 신성 함과 절대성을 인정해야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밖으로 내놓고 찬양하진 못해도 안중근의 의거에 찬동하는 일본인이 생각보다 많을것으로 짐작되는 증거이다.
안중근의사 처형 몇 해 후 치바는 군에서 퇴역하고 경찰관이 되어 한국으로 와 함경도에 배치돼 경찰서장까지 지낸 뒤 1921년 공직을 끝내고 귀향했다. 경찰 재직 중 부인과 함께 황해도의 안중근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 치바가 당시 일제의 수탈로 참혹한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몹시 안타까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있다. 귀향후 치바는 건강 문제로 어려운 삶을 이어가다 1934년 12월17일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운명 직전까지도 치바는 집안에 마련한 불단에 모셔 둔 안중근의사의 유영(遺影)과 필묵을 향해 하루도 빠짐 없이 부인과 함께 합장하며 명복을 빌었다. 운명직전 그는 아내에게 자기 대신 안의사 유영에 매일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아내는 73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유언을 지켰으며 아들에게 남편의 유언을 일러주었다.
안중근 의사 간수 치비 도시치 부부( Japan yahoo)
치바가 안중근의사로부터 받은 필묵은 안중근의사탄생 100주년 해인 1979년 12월12일 안중근기념관에 반환되었다. 치바가(家)는 70년 동안 이 시필(試筆)을 가보로 소중하게 보관하고있었다. 치바 도시치의 가까운 친척인 미우라 구니코(三浦くにこ)여사와 조카인 변호사 카노 타쿠미(鹿野琢見)씨가 전달식에 대표로 참석했다.
아침 7시55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1박2일 예정의 촉박한 나의 일정을 도와주려는 듯 예정보다 15분 앞당겨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잰 걸음으로 서둘러 입국수속을 마치고 모노레일과 전철을 갈아타며 도쿄 역에 이르러 예정 보다 1시간 빠르게 신칸센에 올라 오후 1시 정각 목적지인 미야기현(宮城県) 구리코마고겐(栗駒高原)역에 닿았다. 구리고마고겐은 센다이(仙台)에서 50여킬로미터 북쪽에 있다. 택시로 첫번째 목적지인 다이린지(大林寺)로 향했다. 사찰 건물 바로 앞에 안중근의사가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爲國獻身軍人本分을 새긴 1미터 높이의 비석이 서있고 공동묘역에 아담한 치바 도시치 부부의 석비와 바로 옆에 안중근과 도시치의 우정을 한글과 일본어로 자세히 적은 2미터 남짓한 검은 대리석비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이린지(大林寺)
주지를 만나보기 위해 사방을 오가며 직원을 찾았으나 인기척이 없어 잠시 땀을 닦으며 기다리는데 자동차가 한대 들어왔다. 60줄의 직원이었다. 용건을 알리자 80노인인 주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면회가 어렵다며 미안해 했다. 젊은 시절 아사히신문기자를 거쳐 20여년 전부터 이 사찰의 주지로 봉직 중인 사이토 야스히코(齊藤泰彦)씨는 안중근의사를 존경해 1981년3월 안의사와 치바 도시치의 추도법회를 연 이후 해마다 한일공동법회를 주관해오고있다.
사찰직원에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보여주고 치바 도시치의 생가를 찾는다고 하자 마을면적이 워낙 넓은 데다 농촌이라 몇 채씩 사방에 흩어져있어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시청 담당과에 가서 물어보자며 안내해 주었다. 일본의 시, 군, 구 등의 행정기관에는 유적지나 고분, 건물 등 역사적 의미를 지닌 유적지의 유지관리업무를 관장하는 교육위원회라는 부서가있다. 직원에게 찾는 마을 이름과 주소를 건네 주고 30여 분 기다렸다. 자료를 뒤지고 몇 곳에 전화를 걸어봤으나 마을 이름이 사피라이(猿飛來)라는 것 외엔 치바의 집주소는 아는 사람이 없다며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사찰로 가 문의해 보는게 좋겠다며 사찰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피라이(猿飛來)라는 생가마을 이름이 특이해 직원에게 그 유래를 물어보았다. 글자대로 라면 원숭이가 날아왔다는 의미가 아닌가 했더니, 사피라이는 아이누 말의 Sapi-nai에서 온 거라며 그 원형은 북해도의 삿비나이(札比內) 또는 사쓰나이(札內)와 관련있는 듯 한데 물이 말라버린 개천, 즉 비가 오지않을 땐 바닥이 말라붙고 비가올때만 잠깐 물이흐르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했다. 확실히 치바의 생가 주변엔 이렇다할 만한 개천의 흔적이 없었다. 다른 한 가지는 지금부터 930여 년 전 가마쿠라 막부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가 적군 정벌 때 이지역 신사에 들러 승리를 기원한 후 싸움에 이겨 기념으로 작은 신사를 세웠는데 이때 승리축하라고 쓰인 종이를 목에 감은 원숭이 한 마리가 구리고마산(栗鉤山)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는 설이다.
아무튼 치바의 생가는 개천도 없고 주변이 산뿐인 깊은 산골 마을임에 틀림없었다. 택시를 불러 산길을 한동안 달리자 길 왼쪽으로 완만한 언덕 위에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에게 잠시 기다리라 일러두고 사찰 사무실 문을 열자 8순을 넘긴 듯한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맞아주었다. 몇 마디 주고 받는데 방에 있던 며느리인 듯한 중년 여인이 나왔다. 치바 도시치의 생가를 찾는다고하자 확인해보겠다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어딘가로 전화를 한 후 나와 연락이 닿았다고했다. 사찰에서 내려와 길을 가로질러 건너자 바로 왼쪽으로 비탈에 있는 기와집이었다. 산골농가 치고는 꽤 큰 집이었다. 차에서 내려 오르막길로 들어서자 집 앞 텃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인사를 하고 용건을 말하자 자기가 며느리라고했다. 치바가의 보리(菩提)사찰인 다이린지에서 10여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이다. 가구수가 적으면 서너채, 많아야 십여가구가 모여있는 이러한 두메 산촌을 야마자토(山里)라고 하는데 치바의 생가는 주변에 십여채의 농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바로 그런 마을이었다.
치바의 생가
다소 이른 나이인 50에 타계한 치바는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였다. 밭에서 할머니와 얘기하다 남편인 할아버지에게 몇 마디 물어보고싶다고 하자 현재 98세이며 귀가 어둡고 말도 겨우 몇 마디 밖에 할수없어 대화가 안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88세였다. 가까운 근처에 살고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 뿐이라고 했다. 확인할 요량으로 성함을 묻자 할아버지는 치바 마사미(千葉正巳), 자기는 치바 유리코(千葉ゆりこ)라고 했다. 보통 나이 든 일본인 여자이름의 유리코는 百合子라는 한자를 많이 쓰는데 자기 이름은‘ 히라가나’로만 쓴다고 했다. 마을주민 수백명이 기부금을 모아 새긴 안중근의사와 치바 도시치의 우정을 기념하는 현창공양비(顯彰供養碑)가 사찰 앞 도로 옆에 우뚝 서있다.
현창비
명치 중반 가까운 19세기 후반 치바가 살았던 동북지방 산촌은 관동과 관서지방에 비해 차별이 심했던 데다 몹시 가난해 해가갈수록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이 심해졌다. 동북지방은 고대에 아이누족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8세기 후반 헤이안(平安)시대에 백제도래인 후손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麻呂)가 이 지방을 정복한 뒤로도 계속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당시 이지역 주민들은 멸칭인 에조 또는 에미시(蝦夷)라고 불렸다.
빈농의 차남으로 태어난 치바 도시치는 당시 의무교육과정인 4년제의 소학교 심상과를 마친 후 이어 유료인 4년학기의 고등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포기해야했다. 그후 10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며 집안일을 돕다 군에 입대했다. 일본에서는 자식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자산가가 아닌 경우 차남 부터는 결혼 즉시 분가해 자기 살길을 찾게 돼있다. 운이 좋아 처가가 부자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확률은 그리 높지않았다.
공직생활을 마감한 치바 도시치는 고향인 삿피라이 마을로 돌아와 수시로 다이린지를 찾아 안중근의사를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다이린지 바로 앞에는 800년이 넘은 적송 한그루가 있다. 심하게 휘어진 소나무는 그 모습이 흡사 무거운 짐을지고 힘겹게 오르막을 올라가는 노인같이 느껴졌다. 치바는 특히 눈이 쌓이는 겨울 안의사가 그리울 때면 사찰을 찾아가 멀리 서쪽에 솟아있는 구리코마산을 배경으로 떼지어 날아가는 백조를 쳐다보며 "아득한 저 산넘어 산길을 따라가면 그분이 잠들은 요동반도 남쪽 끝에 다다르겠지" 라며 안중근에 대한 애틋한 심경을 읊조린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삿피라이 마을 사람들이 서산으로 부른 구리코마산은 높이가 1628 미터로 그리 높진않지만 일본열도 북부를 종단하는 오우(奧羽)산맥의 풍광 명미한 명산이다.
할머니와 30여 분 얘기를 나눈 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을 빌다 싶이 간청해 어렵사리 사진 한컷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나이에도 대화 도중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리고 수줍은 태도로 응대하는 게 영락없는 우리나라 농촌의 여느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혹여 시아버지가 남긴 기념될만한 흔적이라도 있을까 싶어 물어보았으나 지금은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했다. 90이 내일 모래인 할머니는 시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집안 불당에 모신 안의사와 시아버지영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합장의 예를 올린다고했다.
필자 권태명(경제학과58학번) :
합동통신 도쿄주재기자/합동통신 워싱턴 특파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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