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자유게시판

​ 2026년10월18일 [權泰鳴칼럼] 孔子와 孟子 그리고 道敎의 故鄕을 찾아가다 [2/2]


페이지 정보

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10-18 13:22 조회7회 댓글0건

본문

 2026년10월18일 [權泰鳴칼럼] 孔子와 孟子 그리고 道敎의 故鄕을 찾아가다 [2/2]

泰山.png

  

泰山(1545m)은 큰 山이다. 山東省 중부의 태안(泰安), 제남(濟南), 역성(歷城), 장청(長淸) 등 4개 市에 걸쳐있는 장대한 山으로 대산, 동악, 대악 등 이름도 여러 개다. 漢武帝는 泰山을 “높고, 크고, 무섭고, 멋진 山” 이라 했고 詩人 李白도 “절벽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간뿐이다” 라고 읊었다. 泰山은 黃河와 萬里長城과 더불어 中國人에게 영묘함을 느끼게 하는 山임에 틀림없었다. 나흘 동안 함께했던 K씨를 보내고 섬서성(陝西省)의 西安으로 여정을 이었다. 西安空港에는 여행 떠나기 전 미리 약속했던 L씨가 내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20대의 젊은이였다.


西安.png

   (西安市)
   

大學院을 다니며 가끔 시간 날 때 아르바이트로 관광객안내를 한다고 했다. 中國대륙 관중(關中)평원의 중앙에 위치한 西安은 멀리 서주(西周)부터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등 13개 王朝의 도읍이었고 지금은 陝西省의 省都이며 3,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古都이다. 옛날 장안(長安)으로 불렸던 西安은 北으로 위수(渭水)가 東西로 흐르고 南으로는 진령(秦嶺)산맥이 東西로 뻗어있어 전략적으로 천혜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西安은 秦始皇의 兵馬俑(兵馬俑)을 비롯하여 대안탑(大雁塔), 종루(鐘樓), 고루(鼓樓), 명대성벽(明代城壁)등 역사적 유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西安이란 이름은 1369년 明 홍무2년 元나라 때의 봉원로를 폐지하고 西安府를 설치하면서 비롯되었다.


西安 大雁塔.png

   (大雁塔)

玄奬.jpg

   (玄奘)

 

訪問 첫날은 市內의 鍾樓와 鼓樓, 明 城壁, 그리고 西安市 동남쪽 교외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을 둘러보았다. 높이가 64m에 이르는 7층규모의 大雁塔은 唐나라 高僧 현장(玄奘)(602~664)이 印度에서 가져온 經典과 佛像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 깊은 塔이다. 塔 이름 ‘大雁’은 보살의 화신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죽은 한 마리의 기러기를 기려 塔을 세우고 그 안에 매장했다는 설화에 비롯되었다. 玄奘이 직접 설계하여 세웠다는 층마다 舍利가 보존되어있으며 11세기에 일부 불탔으며 지금의 塔은 16세기에 重修된 것이다. 大雁塔은 大慈恩寺경내에 있다. 그 다음날은 하루를 잡아 兵馬俑을 찾았다. 오늘날의 師團級에 버금갈 엄청난 규모의 兵士와 기마장군과 말, 그리고 당시의 新銳武器模型을 실물크기로 정교하게 만들어 땅속에 묻어두었던 兵馬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兵馬俑은 세계7대 不可思議의 이름이 올라있는 兵馬俑은 全世界로부터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中國天下를 통일한 秦始皇은 자기의 德政이 3皇보다 높고 공로가 5帝보다 크다 하여 3皇과 5帝를 합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皇帝라 하고 始皇帝라 칭했다. 13세에 즉위한 始皇帝는 즉위와 동시 지금의 西安 동쪽 여산(驪山) 기슭에 陵墓축조공사를 시작하여 36년 뒤에 완공했다. 陵은 남쪽으로 驪山이 솟아있고, 북쪽으로는 渭水가 흐르는 天下明堂으로 꼽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秦始皇.png

 

【筆者註: 秦(BC905年~BC206年)은, 中國의 古代王朝이다. 우리가 中國을 말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말이 秦始皇이다. 始皇帝라고도 부른다. 秦始皇은, 秦나라의 첫번째 王으로서, 皇帝에 오른 사람이 아니다. 始皇帝는, 古代中國의 戰國時代의 秦의 第31代君主(在位:BC247年~BC210年=37년)였다. 위 在位기간중, 最終11년간은, 皇帝로 卽位하여 中國의 初代皇帝(在位:BC221年~BC210年=11年)가 된 사람이다. 始皇帝(BC259年~BC210年)는, 秦王에 卽位한 後, 勢力을 擴大해서 他의 諸國을 차례차례 攻滅하고, BC221年에 中國史上初로 天下統一을 이루워낸 皇帝다. 그것을 始作으로 「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中國歷史上 初代皇帝(在位:BC221年~BC210年)가 된 사람이었다. 秦王이, 처음으로 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한 사람을 말한다. 秦(BC905年~BC206年)은, 中國의 古代王朝로서, 周代?春秋時代?戰國時代에 걸쳐서 存在했고, BC221年에 史上初로 中國全土를 統一, BC206年에 11년만에 滅亡했다. 統一로부터 滅亡까지의 期間을 秦朝, 秦代라고 부른다. 中國初의 統一王朝였던 秦王朝가 BC206年에 滅亡하고, 곧 漢나라가 세워진다.】

 

兵馬俑坑.png

陵墓공사에 70여만명의 죄수를 동원했다는 지금의 陵은 높이가 76m로 본래의 120m에 비해 많이 낮아졌으나 동서 345m, 남북이 350m에 이르러 陵이라기 보다 작은 山이라해야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해마다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수많은 관광객이 그곳을 찾고 있다. 우리가 갔던 날은 날씨가 맑은데다 마침 옛날 복장을 한 男女混成群舞團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더 없는 볼거리가 되었다. UNESCO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되어 있는 兵馬俑 갱(兵馬俑坑)은 1974년 봄 우물을 파던 한 農夫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지방은 연중 강우량이 500mm 정도에 지나지 않아 가뭄이 심한 곳이기 때문에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食水로 사용했다. 農夫가 水路를 찾기 위해 마을 앞 감나무 밭을 4m정도 파 들어갔을 때 사람과 말 모양의 깨진 조각들이 나와 이를 官家에 신고함으로써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신고한 農夫는 당시 30위안을 보상금으로 받았으며 博物館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신이 관광대상이 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 일부러 그를 보러 오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고 한다. 賣場 카운터 뒤 벽에는 Clinton 美國大統領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 농부와 함께 찍은 대형사진이 걸려있었다.

 

현재 발굴된 兵馬俑坑은 모두 3개로 그 가운데 1호갱이 가장 규모가 크고 수 많은 西安은 兵馬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농부가 팠던 우물자리도 1호갱 맨 앞 부분에 보존되어있다. 각자의 임무에 따라 줄지어 진열되어있는 병마는 완전히 깨진 조각을 발굴하여 이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다시 만든 것이다. 秦나라 멸망 후 이어진 초(楚)나라의 항우(項羽)는 秦나라 유적을 파괴하면서 兵馬俑도 산산이 부수었고 또한 받침대인 갱목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검은 그을음의 흔적이 坑內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1974년 1호갱에 이어 지금까지 발굴된 3개의 갱에는 현재 8,000여개의 兵馬俑과 100여대의 戰車 및 400여 개의 기마상이 복원되어있다. 전시된 兵馬俑은 모두 엷은 회색을 띠고 있으나 본래는 赤, 白, 靑, 黑, 綠色 등의 물감을 입혔던 것인데 出土되면서 햇볕을 받자 바로 탈색되어버렸다고 한다. 出土된 兵俑은 계급, 연령, 민족 등에 따라 용모, 복장, 두발모양이 모두 다르게 만들어졌다. 특히 복장은 물론 갑옷의 못과 갓끈, 얼굴주름살, 손바닥의 손금, 신발밑창 무늬 등은 사실적 表現의 極致를 보여주고 있다.

 

말의 경우 이빨모양에 따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兵士들은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서고 앉은 자세와 방향이 다르고, 손 모양에 따라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게 되어있다. 兵俑은 얼굴생김새를 모두 다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당시 秦나라의 軍隊가 多民族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한가지 특징은 모든 兵俑이 秦나라의 적국이 있는 동쪽을 향해 서있고 최근 조사에서 秦나라 兵士 중 Persia系 사람의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1,2,3호 갱에는 지금도 깨진 兵馬俑 조각이 계속 발굴되어 조립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이 아직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3호 갱은 규모가 작은데다 출토된 병사가 모두 큰 관을 쓰고 있어 이들은 將校나 將軍인 것으로 보고 있다.

 

兵馬俑제작자들이 어떤 부류의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인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다. 다만 出土된 兵馬俑의 일부 부위에 새겨져 있는 문자를 연구한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秦王朝의 하층계급에 속했던 陶工들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80여명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無限大의 絶對權力을 휘둘렀던 專制君主가 남긴 不可思議한 歷史遺産이 지금은 수많은 백성의 생계에 수입원이 되고 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兵馬俑과 始皇帝 陵 주변이 지금은 全世界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관광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姜太公3.png

 

兵馬俑을 둘러보고 나오다 함께 간 여행사 K사장이 西安 서쪽 170여km 떨어진 곳에 姜太公(姜太公)의 낚시터가 있다고 해 車머리를 그리로 돌렸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려 오후 2시경 낚시터현장에 닿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찾았다는 姜太公의 조어대(釣魚臺)는 渭水의 작은 지류인 陝西省 보계시 반계진(磻鷄鎭)이라는 작은 산골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천 반계천이었다. 姜太公은 姓이 姜이며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그리고 시호는 太公, 제(齊)태공, 또는 姜太公이며 일반적으로 姜太公으로 불린다. 周나라 文王이 그를 처음 만났을 적에 “이 사람이야 말로 祖父인 太公이 바라던 인물이다”라고 했다는 데서 姜太公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姜太公.png

 

곧게 뻗은 바늘을 그것도 9cm정도 수면 위에 띄워서 낚시를 즐겼다는 姜太公은 하루도 빠짐없이 개천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물고기를 희롱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周나라 文王에게 발탁되어 周나라 건국에 일등공신이 된 姜太公의 젊은 시절은 요새말로 하면 한푼벌이 없는 白面書生의 無職者였다. 남편의 무책임한 삶에 가난을 견디지 못한 그의 아내가 결국 집을 나가고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姜太公은 文王의 아들인 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얼마 뒤 제(齊)나라의 제후로 봉해져 齊王朝를 열었다.

 

文王을 보필할 때 그는 인재등용에는 혈연보다 能力爲主로 발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能力爲主로만 사람을 쓰다간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한 文王의 지적대로 姜太公은 뒤에 臣下인 田氏에게 나라를 찬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姜太公의 釣魚臺는 西安에서 서쪽으로 170여km 남짓 떨어진 깊은 산 속 계곡에 있었다. 渭水를 지나 파란 밀밭 사이 먼지길을 한시간 남짓 들어가자 들판 네거리 중앙에 王命을 받고 出師하는 姜太公의 石像이 나타났다. 산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깎아지른 높은 바위산 아래 작은 마을입구에 姜太公을 중심으로 諸葛亮과 韓信, 張朗 등 20여명의 위인입상이 길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大河 渭水가 거의 바닥을 보일 정도로 물이 말랐는데도 姜太公 釣魚臺 앞 개천은 맑은 물이 제법 풍성하게 고여있었다.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외엔 소음하나 들을 수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사당과 주변에 倒壞直前의 民家 몇 채가 힘겹게 버티고 서있는 적막한 벽촌이었다. 직경이 1.5m 남짓 됨직한 둥글넙적한 바위에는 그가 항상 물을 등지고 꿇어앉아 낚싯줄을 드리웠기 때문에 패였다는 제법 큰 두 개의 무릎자국이 남아있었다. 낚시터 바로 옆에 그를 기리는 樓閣이 있고 그 앞에 낚싯대와 밀집모자, 우장, 바구니가, 그리고 그가 앉았던 바위 위엔 두 개의 짚방석이 깔려있었다.

 

낚시터에서 30여m 위 개천 한 가운데에는 그가 물고기 배속에서 꺼내 물에 버린 콩알만한 작은 돌이 세월이 흘러 커졌다는 큰 바위가 물길을 가르고 있었다. 뒷날 고향인 齊나라 제후가 되어 부임하던 날 姜太公은 환영인파 속에 있던 한 노파를 수레 앞으로 불러내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諸侯로 부임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가 버린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안 老婆는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아내로 맞아 줄 것을 애원했다. 侍從을 시켜 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 한 姜太公은 물을 땅에 쏟고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듯 한번 끊어진 因緣도 다시 맺을 수 없는 法이오” 라는 말을 남기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寶山遼墓壁畵 楊貴妃.png


 (楊貴妃 壁畵)


다시 西安으로 올라가 唐玄宗과 楊貴妃가 향락에 빠졌던 溫泉休養地인 화청지(華淸池)를 찾았다. 驪山 북쪽 산록에 위치한 華淸池는 서주(西周)말기에 개발되어 秦始皇과 唐玄宗 등 中國歷代皇帝들이 離宮으로 삼았으며 玄宗과 楊貴妃의 Romance무대가 된 뒤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蜀나라 출신으로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인 楊貴妃는 16세때 入宮하여 玄宗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皇后를 잃은 玄宗이 그를 좋아하게 되어 22세때 道敎에 입문시키고 아들과 연을 끊게 했다. 5년뒤 玄宗은 그를 환속시켜 王妃로 삼았으며 華淸池에 宮을 짓고 주연으로 지새면서 政事를 멀리했다. 그러는 동안 楊貴妃의 일족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게 되었고 결국 10년후 北境北方수비대장이던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長安을 점령하자 玄宗은 楊貴妃와 함께 蜀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피신 도중 楊貴妃를 처형하라는 근위대장의 간언으로 楊貴妃는 배나무에 목을 메 生을 마감했으며 玄宗도 퇴위당하고 말았다.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華淸池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一級觀光地가 되어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華淸池.png


華淸池 楊貴妃像.png

 

(華淸池 楊貴妃像)


華淸池는 또한 서안사변(西安事變)의 무대이기도 해, 中國現代史에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西安事變은 日本이 中國을 침략했던 1936년 당시 蔣介石(1887~1975)의 부하였던 張學良(1901~2001)이 蔣介石 국민당당수를 배신하여 일으킨 쿠데타이다. 共産軍토벌을 위해 南京에 주둔하고 있던 蔣介石은 1936년 12월 어느 날 그의 부하인 張學良을 격려하기 위해 西安으로 갔다가 비밀리에 共産黨과 손을 잡고 抗日鬪爭을 벌이고 있던 張學良에게 체포되어 華淸池에 연금되고 말았다. 張學良은 바로 延安에 있던 毛澤東에게 蔣介石 체포사실을 통보했으며 毛澤東(1893~1976)은 즉각 周恩來를 西安으로 파견, 蔣介石에게 共産黨을 합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共同抗日鬪爭을 선언토록 설득하여 결국 1937년 제2차 國共合作을 성사시켰다.


國共合作.png

(國共合作)


宋美齡.png

(蔣介石과 宋美齡)


蔣介石이 연금되었을 때 집무실 겸 침실로 사용했던 오간청(五間聽)이 華淸池 뒤 산자락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가 기거했던 침실에는 침대와 전기스탠드, 그리고 오래된 卓上時計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蔣介石이 젊은 시절 부인인 宋美齡과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벽에 유일한 장식으로 걸려있었다. 집무실 겸 회의실에는 낡은 책상과 전화기, 화병 등의 간소한 장식품 몇 점이 장식장 위에 놓여있고 벽에는 正裝軍服차림의 사진 한 장과 天下爲公(천하위공)이라고 쓰인 액자 하나가 걸려있었다. 一世를 風靡했던 英雄이 머물렀던 현장 치곤 너무나 간소하고 초라했다.

 


西安市 德發長.png

(西安市 만두집 德發長)


陝西省은 본래 中國에서도 밀가루음식과 사과, 복숭아, 포도 등 과일재배로 이름난 곳이다. 밀가루음식 중에서도 만두는 이 지방 특산물로 예로부터 皇帝들과 특히 淸나라 徐太后가 즐겨 찾았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만두를 찬양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西安에서 생겨났다. 西安에는 “만두마다 모양과 속이 다르니 백가지 맛을 내네. 한 상의 만두로 천하의 맛을 다 보도다” 라는 말이 있다. 西安市 중심지역에 있는 만두집 덕발장(德發長)은 1000여평에 이르는 4층 건물의 넓은 홀이 오후 6시만 넘으면 모두 손님으로 가득차는 西安의 名所다. 1936년 개업이래 올해로 79년을 맞는 德發長은 만두 하나로 가히 天下를 平靜하고 있다. 맛과 속이 각각 다른 200여 가지의 만두가 손님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 먹을 수도 없고 고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닭, 오리, 물고기 등 온갖 재료로 삶고, 굽고, 찌고, 볶고, 튀기는 등의 방법으로 만든 만두는 맛도 단맛, 신맛, 쓴맛, 고소한 맛 등 맛이란 맛은 다 내고 있으며 모양도 꽃, 새, 물고기, 동물 등 각양각색이다. 물만두가 전문인 德發長의 물만두는 국수와 만두를 한 솥에서 삶는 조리법이 특징이라고 한다.


徐太后.png

   (徐太后)

   

徐太后(1835~1908)가 즐겨 찾았다는 太后전골은 은행열매 만한 만두에 닭고기 속을 넣은 것으로 德發長의 자랑이라고 한다. 西安의 전신인 長安은 唐나라 때 이미 人口가 150만명선에 이르렀고 특히 前漢時代에 개척된 Silkroad의 발달로 세계적인 大都市로 그 명성을 떨쳤다. Silkroad의 시발점이었던 長安은 지금의 西安보다 훨씬 넓었으며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을 갖춘 현대적 기능도시였다. 14세기초 明나라 太祖인 주원장(朱元璋)때 축조된 城은 높이12m에 둘레가 13.75km에 이르며 주변이 해자로 둘러져 있고 원래의 城이 완벽하게 보존되어있다. 지금의 西安시내 도로는 대부분 長安 당시의 길을 다소 넓힌 것이다. 西安은 中國歷史를 돌아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終] 2007-04-08 權泰鳴 作成, 2026-10-18, 서울商大58會 傳達

주고 받은 메일12개전체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주소 : (08826) 서울 관악구 관악로1, 서울대학교 58동 121-1호Tel : 02)761-2278/7172Fax : 02)761-7110사업자등록번호 : 107-82-61468
Copyright © 202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