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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10월17일 [權泰鳴칼럼] 孔子와 孟子 그리고 道敎의 故鄕을 찾아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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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10-18 13:05 조회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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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10월17일 [權泰鳴칼럼] 孔子와 孟子 그리고 道敎의 故鄕을 찾아가다 [1/2]

 

紫禁城.png

(紫禁城)

 

자금성(紫禁城)과 함께 百姓의 집으로는 유일하게 황금색 기와로 지붕을 올린 공묘(孔廟)는 文化革命 때의 멸실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지금은 UNESCO世界文化遺産으로 기록되면서 中國의 자랑으로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孔廟는 孔子의 묘소(廟所)다. 孔廟는 北京의 紫禁城과 泰山의 대묘(岱廟)와 함께 中國3대 궁정건축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山東省 省都인 제남(濟南)에서 남쪽으로 130km 내려가는 山東省 西部의 사수(泗水) 남안에 위치한 곡부(曲阜, 취푸)는 孔子의 고향이자 儒敎의 발상지이다.

 

泰山.png


孔廟.png

 

지금은 人口가 64만여명에 지나지 않은 작은 都市지만 春秋時代에는 노(魯)나라, 그리고 그 이전엔 三皇五帝중 염제(炎帝, 신농씨)와 황제(黃帝)가 도읍으로 했던 긴 역사를 지닌 곳이다. 魯나라 시대의 이름은 창평(昌平)이었다. 周나라 무왕이 동생인 공단(公旦)을 曲阜에 분봉하면서 魯나라가 건국되었고 873년간 왕조가 이어졌다. 석탄채굴과 농업 및 양조업이 주요산업인 曲阜는 지금은 관광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中國의 國家歷史文化名聲(歷史都市)과 UNESCO文化遺産(1994년)에 등재되어있다.



曲阜 大成殿.png

(曲阜 大成殿)

紀元前551년 春秋時代에 魯나라에서 태어난 孔子는 이름이 구(丘), 子가 중니(仲尼), 시호는 문선왕(文宣王)이다. ‘孔子’는 존칭이며 ‘子’는 선생을 뜻한다. Latin語의 Confucius는 孔子의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음역이다. 周나라의 신분제도가 와해되어 실력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태어난 孔子는 周나라 초기로의 복고를 理想으로 한 신분제도의 개편과 인도(仁道)정치를 제창했다. 孔子사후 제자들은 스승의 사상을 받들어 儒家敎壇을 만들었다. 論語는 孔子와 제자들의 어록이다. 孔子 사후 그를 기려 문성(文聖)과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孔子廟2.png

   

孔子의 후손들은 대대로 曲阜에 살면서 歷代朝廷으로부터 후한 대우와 연성공(衍聖公)이란 칭호를 받아 세습하면서 中國제1의 名家가 되었다. 孔子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台灣에 거주했던 77대 후손인 공덕성(孔德成)은 2008년에 사망했다. 현재 曲阜 인근에는 10만이 넘는 孔子후손들이 살고 있다. 極左社會主義運動인 文化革命(1966-1977) 때엔 孔廟가 봉건주의의 상징으로 몰려 파괴대상으로 지목되어 일부에 그쳤지만 피해를 입었으며 曲阜市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질뻔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 후 1980년대 들어 中國이 개방정책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儒敎를 中國의 전통문화로 재조명해야 한다는 캠페인이 일어나면서 다시 國家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濟南공항에서 일주일 동안 통역을 맡아줄 K군을 만나 함께 曲阜로 직행했다. 한시간 반가량 달려 曲阜에 도착했다. 오후5시 조금 넘은 시각인데도 해가 짧은 겨울이라서인지 이미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우람한 2층짜리 옛 기와집 호텔은 관광시즌이 지났는데도 단체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산업시설이 빈약한 曲阜는 옛날부터 이어져 온 밀 농사가 일부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은 관광업이 주민은 물론 市의 재정을 받히고 있다고 K군이 일러주었다. 도착 이튿날 호텔에 가방을 맡겨놓고 아침 일찍 호텔 가까이에 있는 孔廟를 찾았다. 孔廟는 孔子를 제사하는 사당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철 지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일까 관광객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를 해주겠다고 달라붙는 女子들을 겨우 떼놓고 10여분을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건물과 비석들이 너무 많아 설명을 듣지 않고는 뭐가 뭔지 이해가 어려웠다. 할 수 없어 동행한 K군을 보내 가이드 한 사람을 데려왔다.

 

孔廟는 16제곱km의 방대한 면적에 남북1.3km에 이르는 길 양옆에 460채의 건물이 좌우대칭으로 줄지어 서있다. 처음 3칸짜리로 초라했던 孔子 집은 孔子 사후 2년째인 紀元前478년 魯나라의 애공(哀公)에 의해 사당으로 지정되었으며 紀元前205년 전한(前漢)의 劉邦이 처음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역대 12명의 皇帝와 100명의 皇帝代理人들이 孔廟를 196회나 참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隨나라 때인 611년 확장재건 때 3칸 집이 철거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알려져 있는 孔廟는 여러 차례의 증축과 재건을 거쳐 1499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그 뒤로도 건물과 비석 등 일부 추가가 있었다. 孔廟는 무려 2,500년 가까운 긴 역사를 지닌 中國最大의 사당이다.

 

中央에 나있는 1.3km의 직선 길 양쪽에 대칭으로 배치되어있는 孔廟는 첫 번째의 영성문을 시작으로 마지막의 대성전(大成殿)까지 12개의 문이 이어졌다. 폭 54m, 높이32m에 이르는 大成殿은 용트림으로 장식된 28개의 돌기둥이 받히고 있는 우람한 건물이다. 1018년에 건축된 孔廟의 本殿 大成殿은 그 후 증축이 거듭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淸나라 옹정제(雍正帝) 2년인 1724년에 완성된 것으로 中國에서 두 번째로 큰 宮殿級 건물이며 紫禁城처럼 지붕이 황금색 기와로 덮여있다. 大成殿 내부 한 가운데에 3.4m높이의 孔子坐像을 중심으로 조우레 제자들의 상이 줄지어있다.

 

특히 本殿 밖 如意珠를 물고 있는 龍을 조각한 높이6.1m, 직경0.8m에 이르는 육중한 10개의 돌기둥 운용석주(雲龍石柱)가 장관이다. 조각이 너무 화려해 참배하러 오는 皇帝들로부터 시샘을 살까 봐 천으로 둘러쌌다고 한다. 孔廟는 5전(殿), 1사(祠), 1각(閣), 1단(壇 2당(堂), 17비정(碑亭), 53문방(門坊)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각종비석은 2,000개를 넘어선다. 孔廟 안에는 이 밖에도 수백년이 넘은 회나무와 한백(漢柏)남무가 즐비하고 大成門 섬돌 아래에있는 한백은 孔子가 직접 심은 나무에서 계속 씨를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현재의 나무는 5대째이며 樹齡이 수백년에 이른다고 안내인이 설명해 주었다. 大成殿 앞 행단문(杏壇門)은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은행나무 아래서 孔子가 弟子들에게 강론한 것을 기념해 세운 문이다.

 

孔廟의 동쪽에 위치한 공부(孔府)는 孔子가족과 그 후손들이 살았던 주거공간이다. 모두 152개의 건물에 46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公府는 역대왕조의 보호를 받은 中國유수의 저택으로 보호를 받았으나 中華人民共和國건국후 孔子후손들이 台灣으로 移住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일반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孔廟와 공림(孔林)의 유지관리목적으로 1038년에 건설된 公府는 면적이 12제곱km에 이르며 몇 번의 화재와 재건을 거쳐 1889년 개수가 완료되어 1937년까지 孔子후손들이 살았다. 公府에는 지금도 당시의 세간과 거실, 침실, 부엌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77대 후손인 孔德成의 결혼식을 올린 방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묘지로 알려진 孔林에는 孔子와 10여명에 이르는 그의 후손들이 묻혀있으며 歷代皇帝들이 세운 것을 비롯하여 3,600여 개의 비석이 줄지어 서있고 皇帝들이 참배 때 머물렀던 亭子도 여러 개 남아있다. 孔林의 정문인 이림문(二林門)을 들어서자 측백나무 숲이 울창한 넓은 묘역에 궁전 같은 황금색 배전이 나타났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반원형의 孔子의 묘는 그 뒤에 있었다. 묘 앞 비석에 그의 시호인 ‘大成至聖文宣王陵(대성지성문선왕릉)’이라고 새기고 황금색으로 입혀놓았다. 孔子 묘 옆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외롭게 묘를 지켜보고 있는데 이는 孔子가 생전에 아꼈던 제자 자공(子貢)이 6년 동안 묘지기를 하면서 혼자서 스승을 모셨던 단 칸 집이었다.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고 심지어 폭행까지도 서슴지않는 요즘 시대와 너무나 달라 잠시나마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孔廟와 孔府 및 孔林은 모두 1994년 UNESCO文化遺産에 지정되었다.

 

孔廟를 뒤로하고 孔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니산(尼山)의 동굴 부자동(夫子洞)을 찾았다. 山 발치에 있는 동굴은 깊이가 4-5m 남짓한 작은 바위굴이었다. 孔子가 태어나자 호랑이가 먹을 것을 가져오고 독수리가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신선한 공기를 굴 안으로 불어넣어주었다는 傳說이 전해오고 있다. 山 아래로 흘러가는 강변에 초라한 농가 몇 채가 人家의 전부였다. 산중턱에는 후주(後周)시대에 세운 사당과 니산공묘가 있고 마침 주변단장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원래 이름이 니구산(尼丘山)이었던 니산은 曲阜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 떨어져있으며 해발 340m 높이에 이르는 5개의 산봉우리가 한 줄로 이어져 있어 경색이 수려했다. 孔廟 앞마당 한모퉁이에 孔子가 생전에 자주 찾았다는 단아한 亭子가 한 채 있다.


孟廟.png

   (孟廟)
  

저만큼 아래의 江과 들판을 굽어보며 孔子는 “時間도 물처럼 빨리 흐른다. 사람도 늙기 전에 주야로 노력하여 기운을 떨쳐야 한다”는 소회를 읊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다음 행선지인 孟子의 출생지이자 맹묘(孟廟)가 있는 추성(鄒城, 추챙)으로 차를 돌렸다. 孟子는 紀元前 372년에 태어났다. 성은 맹(孟), 자는 자여(子輿) 또는 아성(亞聖)이고 휘는 가(軻)이다. 추성은 곡부와 같은 山東省에 속하며 곡부에서 남쪽으로 20여km 떨어져 있다.

 

歷代中國皇帝들이 신앙에 가깝도록 숭배했던 孔子와는 달리 中國을 대표하는 위대한 思想家요 유가(儒家)인 孟子의 사당인 孟廟는 규모나 외관 면에서 孔廟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빈약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孟子를 높여부르는 아성(亞聖)을 붙여 아성묘(亞聖廟)라고도 하는 孟廟는 남북으로 458m, 동서로 95m에 이르는 장방형으로 1037년 宋나라 황실에 의해 성역화되기 전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孔廟가 皇帝級이라면 孟廟는 諸侯級이라고나 할까. 사전적 의미의 亞聖은 성인에 버금가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孟子를 亞聖이라고 부르는 것은 孔子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존칭이다.

 

아성부(亞聖府)라고 일컫는 孟子후손들의 주거지인 孟府도 孟廟처럼 기와가 검은색 일색으로 소박하게 느껴졌다. 孟廟나 孟府 보다는 孟子 후손들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孟子어머니의 묘소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古事로 유명해서인지 비교적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고 관광객들도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추성에서 曲阜 방향으로 10km 정도 올라가자 길옆에 맹모림(孟母林) 이라고 쓰인 가족묘지 맹림(孟林)의 출입문이 나타났다. 孟林에는 관리인이 없었다. 孟母의 墓는 수천기에 이르는 후손들의 무덤 사이로 사방에 비석이 난립해 있는 孟林을 한참 들어가는 깊숙한 곳에 있었다. 孟廟 경내에는 孟子어머니의 자식교육에 관해 에피소드를 남긴 맹모단기처비(孟母斷機處碑)가 있다.


孟母斷機處碑.png

 

孟子가 학업을 다 마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짜고 있던 베를 칼로 잘라버리면서 學文을 도중에 중단하는 것은 짜던 베를 자르는 것과 같다며 아들에게 훈계했다는 일화(逸話)를 전하는 비석이다. 현재 비석이 서있는 장소가 베틀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였던 孟子는 性善說에 기초한 자신의 정치철학인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王道政治를 구현해 줄 君主를 찾아 천하를 뒤지며 다녔으나 실패하자 뜻을 접고 결국 후진교육에 전념키로 했다. 孔子의 인(仁)사상에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의(義)를 더해야 한다고 주창한 孟子는 孔子가 성인반열에 오른데 반해 그는 다음 위계인 아성(亞聖)에 이르는데 그치고 말았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孟子’는 孟子가 일생을 통해 제자들과 주고받은 문답을 비롯하여 그의 어록과 논쟁 등을 수록한 책이다.

 

曲阜에서 북쪽으로 약 100km거리에 위치한 태산(泰山)은 中國 오악(五嶽) 중에서도 第一의 靈山으로 꼽힌다. 그래서 中國사람들은 泰山을 오악지장(五嶽之長) 또는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부른다. 中國歷代皇帝들이 하늘의 뜻을 받고 또 자신의 치적을 보고하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했던 곳도 바로 泰山자락의 태안(泰安)에 있는 대묘(岱廟)이다. ‘갈수록 泰山’ 이나 ‘山 너머 山’은 모두 中國의 泰山을 두고 생긴 말이다. 泰山은 中國道敎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泰山의 최고봉인 1,545m 頂上인 玉皇峰에 玉皇上帝를 받드는 사당이 있다. 1,545m 표지석 옆에 원형으로 세운 돌기둥에는 수천개의 자물쇠가 겹겹으로 걸려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또는 가족들 사이에 변함없는 우정과 사랑을 약속한다는 징표로 자물쇠를 잠근 후 영원히 못 풀게 열쇠는 버린다는 동심건(同心鍵)이다. 정상 길옆에는 孔子의 등정을 기념하는 공등암(孔登岩)이라고 새겨진 둥근 바위가 있고 거기서 가까운 孔子사당 앞에 참배객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泰山頂上의 천가(天街)문을 들어서자 자동차도 다닐만한 넓은 길이 100m나 길게 이어졌다. 길옆으로 기념품가게와 이곳의 자랑인 전병과 국수집, 그리고 여관이 줄지어있다. 玉皇峰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전면에 해서체로 쓰인 ‘天下大觀’ 이란 제목 아래로 금가루를 입힌 음각명문(銘文)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石刻비문은 唐玄宗의 친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 옆에 泰山을 상징하는 五岳獨尊이란 글귀가 새겨진 바위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 泰山頂上에서 본 아름다운 경관을 문자로 표현하기 힘들어 돌만 세워 놓은 무자비(無字碑) 또한 특이한 볼거리였다. 泰山에는 頂上이 아닌 곳에도 皇帝, 詩人, 墨客, 學者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감상문이나 詩를 수 없이 볼 수 있으며 최근 것으로는 毛澤東이 쓴 詩句와 周恩來의 夫人인 등계초(鄧穎超)의 각문(刻文)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泰山 南天門.png

 

泰山자락에 서있는 일천문(一天門)에서 泰山頂上의 벽하사(碧霞祀)까지 9km니 되는데 이 길이 무려 7,412개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이 너무 많아 관광객들은 대개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泰山頂上에서 볼 일을 마치고 泰山川가의 남천문(南天門)에서 山 중허리쯤에 위치한 중천문(中天門) 버스정류장까지 3.2km의 돌계단을 걸어서 하산했다. 18구비에 수직 가까운 1,600여 개의 계단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중간쯤 내려가자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내려와 버스를 탔으나 발이 바닥에 닫았는지 서있는지 느낌이 없었다. 그 길을 올라가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두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2007-04-08 權泰鳴 作成, 2026-10-17, 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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